책머리에…
내 생각과 경험을 책으로 만들어 많은 사람들이 읽도록 하는 것이 과연 하늘의 뜻에 합당한 일일까 망설이다가 수년의 세월이 또 흘러갔다.
나의 의도를 오해하거나 왜곡하여 악용하는 사람들이 생겨나지는 않을까 하는 잡다한 생각들이 순간순간 발목을 잡곤 했다.

속세와는 인연을 끊고 수도에만 전념하는 분들 중에는 내가 감히 쳐다볼 수도 없을 정도로 높은 경지에 도달한 분들이 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분들은 함구하고 있는데, 내 주제에 뭔가 안다고 떠드는 것이 참으로 송구스런 일이다. 부끄럽기도 하고, 주제넘기도 하고…그래서 더더욱 망설였고, 늦어졌다.

내가 하고자하는 일은,
결국 나 정도의 수준에 도달한 자의 몫이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부족함을 알면서도 필을 들었다.
사실, 아직도 모르는 것이 너무 많고, 깨우치지 못한 것이 태산과도 같다.
인간이 완성되기까지 일만 가지의 깨달음을 얻어야 한다면,
필자의 것은 하나도 채 못된다는 것이 솔직한 고백이다.
하지만 나로 하여금 필을 들지 않을 수 없는 구실을 준 것은,
시중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책들 중에서
유체이탈(遺體離脫)에 관하여 올바르게 씌어진 것을 찾을 수
없다는사실 때문이었다.
간혹 언급이 되어 있는 것들도 사실과는 거리가 먼 것이 대부분 이었고,
외국의 서적에서 인용하거나 베껴 쓴 외국인들의 이야기였다.
그러한 것들은 공연한 호기심만 자극할 뿐 아무에게도 도움이 되지 못할 내용들이었다.
그러한 정보는 바른 길을 찾는 이들에게는 도움도 되지 않고,
오히려 방해가 될 뿐이다.

필자는 이십 여 년 전에(70년대 초) 우연히 유체이탈을 경험하였고,
십 여 년 전(87년도)부터는 필요할 때마다 스스로 이탈을 해왔다.
그러한 과정을 통해서 조금씩 생(生)의 비밀을 알게 되었고,
종교의 본질을 이해하게 되었으며,
나의 내부에서 발생하는 의문들이 하나씩 껍질을 벗게 되었다.

이 세상에는 필자가 겪었던 의문과 고통과 유사한 이유로 방황하는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이 글은 그들을 위한 것이다.
나에게는 스승이 없었다.
그 때문에 어려움이 많았고, 시행착오도 많았다.
먼길을 빙빙 돌다가 제자리로 돌아간 적도 많았고, 두려움과 고통,
나 자신의 확신이 의심스러워 많은 시간을 낭비하기도 하였다.

나는 스스로 스승을 자처하고자 하는 것은 아니다.
필자와 비슷한 경로를 헤매면서 시간을 낭비하거나
엉뚱한 길로 빠지는 사람들이 부디 없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이 글을 쓴다.

이 글은 철저하게 필자가 겪은 경험의 산물이다.
과장하거나, 거짓을 사실인양 포장하지도 않았다.
남의 경험이나 이야기를 도용하지도 않았다.
그리고 나를 자랑 하고자 쓴 것도 아니니 과대평가하지도 말고,
그렇다고 과소평가도 하지 말고, 있는 그대로 보아주었으면 주었으면 좋겠다.

산길을 가다가 우연히 또 하나의 길을 발견한 사람이
그 산을 찾을 또 다른 사람을 위해서 안내문을 한 장 써놓고 지나갔다고 생각 해주었으면 족하다.
바른 길을 찾고자 열망하는 사람들에게 조금이나마 도움이 된다면 더 이상 바랄 것이 없다.

유체이탈의 실행 방법만을 기술하지 않고 잡다한 얘기가 서두에 많은 것은
나름대로 이유가 있으니 읽어주면 더더욱 고마우리라.

한가지 정말 죄송스러운 것은
필자의 문장력이 미천하여 독자들이 읽는데 불편함이다.

1995년7월에 筆者

목 차

제1부 유체이탈이란 무엇인가?
제1장 유체이탈의 정의………………………………..6
제2장 유체이탈의 목적……………………………….10
제3장 귀신(鬼神)은 있는가? ………………………..64
제4장 전생(前生)과 윤회(輪回)………………………72
<잡담>기독교도와의 설전…………………………….81

제2부 유체 이탈의 실행
제1장 실행에 앞서……………………………………99
제2장 가위눌림과 귀접(鬼接)………………………102
제3장 유체이탈의 실행방법………………………..113

<여담>
꿈 이야기……………………………………………..119
안식향 태우는 방법………………………………….121
성서의 역사……………………………………………121
유체 이탈 후 실험……………………………………122
후기……………………………………………….. 123

제1부 .유체이탈 이란 무엇인가?

제 1장. 유체이탈의 정의
국어 사전에 의하면 유체(遺體)란 “부모님이 물려준 몸”이라고 설명하고있다.
유체(遺體)이탈이란 그 몸(유체)에서 빠져나가는 행위를 말한다.
어떤 사람들은 유체(幽體)라고 쓰는 것을 보았는데,
이는 사전에도 없는 단어지만, 유(幽)는 몸이 없는 상태를 말하는데,
거기에 체(體)를 붙인다는 것은 당연히 맞지 않는 표현이라고 할 수 있겠다.

유체 이탈이란 죽은 사람이 아닌 산(生) 사람이 임의로 육신을 이탈하는 행위를 말한다.
육신을 두고 빠져나간 것은 무엇인가?
통상, 그것을 “영혼(靈魂)”이라고도 하고, “혼(魂)”이라고도 부른다.
또, 그것은 방법에 따라서 양신(陽) 이탈과 음신(陰) 이탈로 분류된다.

양신 이탈이란 무엇인가?
단전호흡(丹田呼吸)으로 기(氣)를 운행하여 하단전(下丹田)에 축기(縮氣)하고,
소주천과 대주천이라는 과정을 지나서 수행(修行)이 최고조에 이르면,
자신의 내부에 응집되어 있는 양기(陽氣)를 뽑아내어 인간의 형태로 만들 수 있다고 한다.

그것을 양신이라 부른다.
처음에는 갓난아이처럼 작은데, 아이를 키우듯 양기를 더해가면서 훈련을 시키며 키운다고 한다.
어린아이처럼 천방지축(天方地軸)인 양신을 마치 사람 키우듯 정성스럽게 키워 성인 정도로 성장하면,
그때까지 몸담았던 낡은 육신을 태워 없애버리고 자신의 혼(魂)을 양신으로 옮겨 담는다.
양신은 찰나(刹那)에 수 백리를 오고 갈 수 있으며,
천계(天界)와 지계(地界)를 마음대로 넘나들 수 있다고 한다.

이것이 바로 양신이탈이다.
다른 말로는“우화등선(羽化登仙)”이라고도 한다.
신선(神仙)으로 화(化)한 것이다.
즉, 양신이탈이 가능하다는 말은 이미 신선(神仙)의 경지에 들어섰다는 말이 된다.
참으로 어려운 일이다.
아무나 가능한 일도 아니다.
한 두 번의 삶에서는 이룰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된다.
그러한 경지에 도달한 분들은 속세에 모습을 드러내거나 삶들을 모아 가르치지 않는다.
그 이유는 모르겠지만, 변변한 저서도 하나도 남기지 않는다.
누구누구는 신선이 되었다하더라…하는 이야기만 전해져 올뿐이다.

필자도 양신(陽身) 이탈이 불가능한 상태라서 책에서 읽은 정도의 상식으로
설명하고 있으니 양해를 해 주었으면 좋겠다.

그러면 음신 이탈이란 무엇인가?
필자와 같은 보통 사람이 육신이란 옷을 벗어놓고 잠깐 동안 혼의 상태로 돌아감을 말한다.
일부 선도(仙道)인들 중에는 음신 이탈을 위험한 행위로 생각하여 금기 시 하기도 한다.
그러나 필자의 경험으로 보면 혹자들이 말하는 것같이 위험한 일은 아니었다.

영혼이 이탈했다가 자신의 육체를 찾아가지 못 한다거나
이탈 중에 다른 혼이 자신의 육신을 차지하고 비켜 주지 않는다거나
하는 일은 결코 발생하지 않았다.
지금까지 줄잡아 천회가 넘는 이탈을 실행하면서 얻은 결론이다.

그리하여 음신 이탈을 위험한 장난으로 말하는 사람은
실제로 행(行)하여 보지도 않았을 것이라는 결론에 도달했다.
올바른 마음으로 실행한 사람은 절대로 그런 말을 할 수 없을 것이다.

음신 이탈은 인간이 가야할 길을 올바르게 알고자 하는 사람은
반드시 거쳐야 할 과정이라고 생각된다.
특히 종교에서의 가르침을 바르게 깨닫게 하며, 신의 뜻을 바르게 감지 할 수 있게 된다.
그러다 보면 종교를 믿는 사람들은 자신의 종교 안에서 더욱 더 확실하고 올바른 믿음을 갖게 되고,
기독교나 불교의 탈을 쓴 사이비 종교인들에게 현혹되는 일이 결코 없게 될 것이다.

음신 이탈도 공(功)이 깊으면 팔백 겁(怯)을 환생하지 않고 천상(天上)에 머무를 수 있다고
어느 책에서 읽은 적이 있다.

한 겁(劫)이란 상상을 초월하는 개념의 시간이다.

천지개벽(天地開闢)하여 만물이 생겨나고 다시 천지개벽하여
모든 것이 사라질 때까지의 시간이 한 겁이다.
수 만 년이 될지, 수십억 년이 될지 아무도 짐작 하지 못한다.
그렇게 인간의 상상을 초월하는 긴 시간이 팔백 번 되풀이 할 동안
천상에 머무를 수 있는 자격이 주어진다는 것이다.
우리들의 관점으로는 영원(永遠)과도 같다고 할 수 있다.
음신이탈도 공이 깊으면 이렇게 긴(?) 기간동안 천상에 머무를 수 있다고 한다.
그 사실여부를 확인할 방법은 없지만,
음신이탈이 위험하거나 나쁜 행위는 분명히 아니라는 것을 말해 주고 있는 것이다.

이 모든 이치를 알아내는데 있어서 삶이 윤회한다는 사실을 부정하면 불가능해진다.
그래서 기독교인들은(특히 개신교) 스스로 만든 울타리 안에 가두어진 것과 같다.
기독교인들은 환생(幻生), 전생(前生) 이야기만 나오면 심한 거부 반응을 일으킨다.

왜?
삶이란 단 한번뿐이며 그 삶을 끝으로 천국과 지옥으로 분류되어 영원히 벗어날 수 없다고 배워 왔다.
가르치는 사람도 그렇게 배웠기 때문에 그렇게 가르칠 수밖에 없었고,
그러한 틀에서 벗어나면 이단으로 취급받는 풍토 속에서 살아가고 있기 때문에 그들이 마음을 열기란 참으로 어렵다.
윤회를 얘기하고 있는 불교를 우상 숭배 집단으로 보는 기독교인들이 많으니 안타까운 노릇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공개적으로 말을 하지는 않아도 삶이 윤회(輪回) 한다는 것-
그것이 불변의 법칙이라는 사실을 인정하는 성직자(聖職者)들도 더러 있다.

그러면 현재의 기독교에서는 왜 윤회를 부정할까?
그것을 알고 싶으면 교회의 역사부터 먼저 알아야 한다.
간단한 역사적인 사실 몇 가지만 알아도 그러한 의문은 쉽게 해결된다.
중요한 것은 윤회의 법칙을 배제하면 성서(특히 신약부분)조차
해석이 올바르게 되지 않거나 상당히 왜곡된다는 사실이다.

당신이 올바른 마음으로 수련하고 유체 이탈을 실행한다면
필자가 헛소리하지 않았다는 것을 당신 스스로 증명하게 된다.
그것은 자신의 깨달음이다.
앞으로 필자의 하는 모든 이야기들은 이러한 방법을 통해서
자신의 것으로 만들어야 한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아무런 의미가 없다.
타인의 이야기를 듣고, 그 사실을 믿어 주기만 해도
윤회에서 벗어나 영원히 천국에 머무를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얼마나 쉬운 일인가?
천국에 들어가지 않을 사람이 거의 없을 것이다.
하지만, 문제는 그렇게 쉽게 해결되지 않는다.
믿음이란 유리항아리에 물을 담는 것과도 같다.
너무 쉽게 깨질 수 있는 것이다.
믿음이라는 도구를 함정으로 이용하고 있는 경우도 허다하니
참으로 분별하기 어려운 세상이다.

모든 것을 스스로 자신에게 증명하여
온전히 자신의 것으로 만들지 않으면 모든 것이 다 헛수고다.
사상누각(砂上樓閣)에 불과한 것이다.

제2장 유체이탈의 목적(目的)

살아있는 모든 사람은 육신이 있고 그 육신을 지배하고 있는 것은 마음, 즉 정신(精神)이다.
정신은 어디서부터 나오는 것일까?
정신은 영혼으로부터 출발하여 교육과 경험을 통해서 조금씩 가다듬어 나간다.
정신이 바로 영혼이냐 하면 반드시 그렇지는 않다.
어떤 사람의 정신 상태를 보면 영혼의 상태도 짐작 할 수 있지만,
필설로 영혼을 표현하기란 참으로 어려운 일이다.
이탈을 실행하면서 조금씩 알게 되겠지만,….

보통 우리들이 “나”라고 말하는 것은 여러 가지가 포함된 것이다.
지식(知識), 학식(學識), 교양(敎養), 재산(財産), 지위(地位), 경력(經歷), 경험(經驗), 외모(外貌) 등이 포함된 것이다.
사람에 따라 평가 기준의 차이가 있고, 타인을 평가하는 것은 바로 자신의 잣대를 기준으로 삼는다.

사람이 죽으면 살아가면서 얻은 것들을 모두 잃게 된다.
재물은 물론이고 지식이나 학식 등과 같이 기억 속에 있던 것조차 모두 사라진다.
거의 대부분 본능(本能)만 남게 된다.

음신이탈을 하면 어떤 상태인가?
죽은 것과 같은 상황을 맞이한다고 볼 수 있다.
다시 말하면, 음신이탈을 한다는 것은
현재의 자신이 죽은 상태를 경험하게 되는 것이나 다름없다.
살아가면서 얻은 것을 모두 잃는다는 사실은 누구나 알고 있다.
그러나 뇌에 기록된 지식이나 학식 따위들도 모두 사라진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이 많다.
그렇다면, 사람이 죽은 후 남는 것은 무엇일까?
자신의 영혼을 깨끗하게 하고자 노력한 흔적만 남는다.
흔히들 공(功)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것조차 헛것이 많다.

이 세상에서는 어떤 일, 어떤 직위에 있었느냐를 중요시하지만,
저쪽 세상에서는 어떻게 했는가가 더 중요하다.
똑같은 일도 공이 될 수도 있고, 그렇지 못한 경우가 있다.
창녀(娼女)도 공을 쌓을 수 있지만
성직자(聖職者)라고 자처하는 사람들 중에서도
공을 쌓지 못하는 경우도 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어떤 부자가 살아있을 때에나 죽은 후에 칭송을 받기 위해서
수십, 수 백 억의 재산을 헌납하여 교회나 사찰을 짓는 거창한 행위가,
가난한 사람이 어떤 배고픈 이에게 자신의 밥 한 그릇을 양보하는 것 보다
훨씬 더 가치 없을 수도 있다는 것을 알아야한다.

이쪽에서는 신(神)과 거래를 가능하다고 가르친다.
특히 대부분의 교회에서는 그렇게 가르치고 있다.
그러나 막상 저쪽(저승)에 가보면 그런 짓이 통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된다.
흔히들 교회에서의 봉사활동(奉仕活動)이나 불도(佛徒)들의 방생(放生)하는 행위도
본인들의 생각과는 다르다.

그러면, 재물을 나누어주고 봉사하는 행위가 아무런 의미도 없으니 하지 마라는 것인가?
그런 얘기가 아니다. 자의든 타의든 그런 행위에 의미나 가치를 부여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재물이 많이 쌓였으니 필요한 이들에게 나누어줄 수 있고,
그렇게 해도 내가 살아가는데 지장이 없으니 다행이고,
그런 행위가 가능한 형편이기 때문에 할뿐이지,
남에게 칭송 받기 위해서나 신 앞에서 당당하기 위하여 하는 짓이 아니라는 것을
자신에게 가르쳐야 한다.
현실적으로 상당히 어려운 일이다.
그러나 불가능 한 일은 아니니 자신에게 가르치면 점차 가능 해 진다.

“예수”의 가르침 중에 “왼손이 하는 일을 바른 손이 알지 못하게 하라.”는
말이 있다.
왜 그분은 그렇게 가르쳤을까?
대부분의 기독교인들은 그 깊은 뜻도 모르면서 함부로 정의를 내린다.

그 말씀의 뜻은 스스로 자신 안에서 겸손해져 그런 행위 자체에
스스로 무게를 두지 않고 초연해지는 경지를 말하고 있는 것이다.

타인과는 전혀 상관없는 말이다.
타인을 의식한다면 이미 겸손과는 거리가 멀다.
공(功)과는 별개의 경지를 가르치고 있는 말이다.
아주 깊은 수양의 경지로 가야한다는 것을 가르쳐주고 있는 말씀이다.

“왼손”은 누구요 “바른손”은 누구인가?
흔히들 왼손은 자신이요 바른손은 타인으로 해석한다.
천주교든 개신교든 대부분 그렇게 얘기하고 있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그 깊은 뜻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왼손과 바른손이 모두 한 몸에 붙어있듯이 왼손도 자신이요 바른손도 자신이다.

자신이 하는 행위를 자신도 모르게 할 수 있는가?
상식적으로는 불가능한 일이다.
그런데도 그렇게 하라고 가르쳤다.
헛소리하실 분이 아닌데 그렇게 하라고 한 것은 그만한 이유도 있고,
또 가능한 일이기 때문이다.
가능하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 이미 느낌이 잡혔을 것이다.
이렇게 까지 설명을 해도 무슨 얘기인지지 모르는 사람은 한동안 노력해야 할 것이다.
그렇게 하는 중에 여러 가지 의문이 풀리게 될 것이다.

그분은 또,
“부자(富者)가 천국에 들어가는 것은 낙타가 바늘구멍을 들어가는 것 보다 더 어렵다”고 했다.
왜 그렇게 심한 말을 하였을까?
다른 말로 바꾸면 “부자는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라고 선언(宣言)을 한 것이나 다름없다.

아무나 부자가 될 수 있는가?
철저하게 양심적(良心的)으로 사는 사람도 부자가 될 수 있다고 믿는 사람이 과연 있을까?
우리 주위에서 부자라는 소리를 듣는 사람들의 삶은 어떠한가?
도대체 무엇을 어떻게 하였기에 모두 부러워하는 부자가 될 수 있었을까?

넓고 호화로운 집, 소리 없이 굴러가는 서민들의 집보다 몇 배나 비싼 자동차,
수 천 만원을 호가 하는 골프 회원권, 조용한 호숫가의 별장,
초호화 아파트, 외산 자재로 치장한 고급 빌라.
이런 것들을 소유하기 위해서 탈법, 불법을 하지 않고도 과연 가능할까?
하긴, 우리나라에서 내라는 세금 다 내면 남는 것이 별로 없겠지만…

권모술수 없이, 남의 재산을 합법(?)적으로 가로채지 않고도
큰 기업을 이룰 수 있을까?

요즈음은 노태우 씨의 비자금 사건으로 온 나라가 들썩거린다.
매스컴의 태도변화는 나날이, 시시각각 달라진다.
야당의 태도 또한 주목받을 만 하다.
자신들은 진정 결백한거 같이 떠들어대는 사람들 – 그들 대부분이
사후(死後)에는 비슷한 대접을 받거나 오히려 그 이하가 될 가능성이 있다는 것을
안다면 그렇게 뻔뻔스러울 수가 없을 텐데.

자의든 타의든 잘못은 누구나 할 수 있다.
중요한 것은 자신의 잘못을 진심으로 뉘우치는 일이다.
그것은 오직 자신밖에 모른다.
그리고 그것은 사후(死後)에 그대로 드러난다.
이 세상에서는 적당히 감출 수도 있고, 거짓으로 참회 할 수도 있지만,
사후에는 어림없는 일이다.
지나친 재물욕, 권력욕은 모두 자신을 망치는 지름길이다.

재물에 욕심 없는 사람이 부자가 될 수 있는가?
권력욕(權力慾)이 없는 사람이 권좌(權座)에 오를 수 있는가?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온갖 야비하고 나쁜 방법을 동원해야만 한다.
또, 그것을 유지하기 위해서도 그만한 수단을 강구해야만 한다.
때로는 남을 파멸시키기도 해야 하고, 살인까지 해야 하는 경우도 있다.

그렇게 살아가야 하기 때문에 그들은 자신을 돌아볼 여유가 없다.
그렇게 정신없이 양심을 외면한 채 살아가다보면,
인간이기 때문에 나이가 먹어감에 따라 허전해지고 일말의 두려움을 느끼게 된다.
그래서 사회사업에도 적당히 참여하고, 절에 나가 불공도 드리고
큰돈을 헌납하여 절도 짓고 불상(佛像)도 세운다.
어떤 사람들은 교회에 열심히 나가서 유사한 행위를 한다.
교회에서는 대환영이다.
온갖 칭송과 찬사가 쏟아진다.

어떤 작자들은 그런 행위가 하느님을 위한 일이라고 속여가면서 더 많이 짜내려하고,
감언이설(甘言利說)에 속은 자는 마치 천국행 티켓이라도 예약된 것처럼 거들먹거린다.
부자들은 가진 것이 돈밖에 없으니 돈으로 천국을 사려 할 수밖에 없고,
종교인(宗敎人)들은 그런 약점을 아주 잘 이용한다.

그들이 천국에 갈 수 있다고?
그것이 가능하다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치부 할 사람이 엄청나게 생겨날 것이다.
나중에 돈으로 때우면 다 되니까.

그래서
“예수”께서 “부자는 천국에 갈 수 없다.”라고 이미 이 천년 전에 우리들에게 경고(警告)한 것이다.

그렇다면 부자, 권력자와 적당히 야합하거나 그들을 이용한 종교인들은 어떻게 될까?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능히 짐작 할 수 있을 것이다.
독자 여러분의 상상과 판단에 맡긴다.

필자는 확실히 알고 있다.
확실하게 알기 때문에 이렇게 자신 있게 여러 사람에게 말할 수 있고,
또 이렇게 하는 것이 내 소임이기 때문이다.

어떤 이는 필자의 말을 쉽게 믿을 것이요, 어떤 이는 반신반의(半信半疑) 하겠고,
어떤 이는 코웃음을 칠 것이다.
그러나 믿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다.
필자의 말을 믿어 달라고 이 글을 쓰는 것이 아니다.
또 그렇게 쉽게 남의 말을 믿어서도 안 된다.
괜찮다 싶은 것을 그대로 믿고, 무작정 따르는 것은 아주 위험한 일이다.

예를 들자면,
휴거 된다는 주장을 하면서 사람들을 현혹시킨 장본인들은
자신들의 주장이 가짜라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그 말을 무작정 믿고 따르던 사람들은
이미 자신들의 어리석음에 대한 대가를 톡톡히 치렀다.
그러나 그것이 전부가 아니라는 것이다.
앞으로도 대가를 더 지불해야하고 잘못하면 죽어서까지 연장된다.

그렇기 때문에 독자 여러분 중에서 필자의 말에 공감(共感)하는 분들은
반드시 필자의 얘기를 의심(疑心)해야만 한다.
그래야만 본인 스스로 확인하고자 할 테니까.
확인 하고자 하는 과정이 유체이탈이다.
그리고 올바른 것을 알고자 하는 마음 – 그것이 바로 유체이탈의 목적이다.

필자의 주장에 동조하는 자신의 생각을 하나씩 자신에게 증명하여
온전히 자신의 것으로 만들어 가지 않으면 모든 것이 헛일이다.
그저 남의 일일뿐이다.

그렇게 하는 과정 중에 많은 것을 깨닫게 될 것이다.
아는 것과 깨달음의 차이는 말할 필요도 없다.
안다는 것은 지식(知識)의 수준이요 거품과 같은 것이다.

안다는 것과 깨달음의 차이를 묻는 사람이 가끔 있다.
아주 간단한 예를 들어보자.
요즈음 초등학교 이학년이 되면 구구단을 외우기 시작한다.
(필자의 어린 시절에는 삼학년부터 시작했지만)
구구단을 외우지 못하면 가장 기본적인 곱셈과 나눗셈을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쉽게 외우는 아이도 있고, 더디게 외우는 아이도 있지만,
세월이 감에 따라 결국 거의 다 외우게 된다.

이때, 왜 구구단을 외워야 하는지,
구구단이 어떻게 해서 그렇게 이루어지는지 가르치지는 않는다.
하지만 세월이 가다보면 왜 삼삼은 구(3×3=9)가되는지,
팔육 사십팔(8×6=48)이 되는지 스스로 그 이유를 알게 된다.
또, 그렇게 달달 외우게 한 이유를 가르쳐 주지 않아도 알게 된다.

이렇게 스스로 그 근본 원리를 알게 되는 것이 깨달음이다.
스스로 그것을 깨우치고 난 다음에는 누가 그것을 흔들어 깨려고 해도
되지 않는다.
이런 점이 배워서 아는 지식의 수준과는 엄연하게 다르다.

혹자는 또 이렇게 말한다.
“수행을 하다보면 폭탄에 의해 댐이 무너지듯이 모든 사물의 이치를
단번에 알게 되는 것이 깨달음이고, 그러한 경지를 득도(得道)라고
한다.”

필자는 이런 주장에 동의하지 않는다.
스스로 득도 했다고 자처 하는 사람들의 언행을 보면 도저히 납득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임의로 유체 이탈이 가능했던 초기시절에 나의 머리 속에는 아주 작은
전구(電球)가 가득 차 있다는 느낌이 들었고,
그것이 하나씩, 때로는 두세 개 씩 반짝 하고 켜지는 것을 느끼게 되었다.
그것이 다 켜지는 날 완전한 깨달음을 얻었다고 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것이 득도의 경지인 것일까.
그 많은 불을 언제나 켤 수 있을지 나 자신도 가늠이 되지 않는다.
또, 얼마나 많은 양이 들어있는지 셈도 불가능하다.
하지만, 분명히 조금씩 밝아지고 있다는 것을 느끼게 되었다.

사람마다 목적과 가치기준이 조금씩 다르다.
그렇게 윤회를 거듭했기 때문에 자연히 수준도 다르게 된 것이다.
자신이 켜야 할 전구의 숫자도 각각 다를 것이다.
중요한 것은 그것을 밝히려고 하는 자신의 노력과 목적이다.
자신이 지향하고 있는 바가 바르고 확실하다면, 언젠가는 반드시 환하게 모두 밝힐 날이 올 것이다.

깨달음은 지식의 수준을 넘어서 자신의 영혼에 각인(刻印) 되는 것이다.
지식(知識)에는 스승이 있을 수 있지만 깨달음에는 스승이 없다.
깨달음의 스승은 바로 자기 자신이다.
지식의 바탕위에 부단한 자신의 노력과 올바른 목적이 있다면
한 가지씩 스스로 깨닫게 될 것이다.

따라서 필자의 말에 공감(共感)하고, 실천에 옮겨 자신의 것으로 만든 것이 있다면
그 공(功)은 모두 자신의 것이다.
필자에게 공을 돌리거나 고마움을 느낄 필요는 없다.
모두 자신이 스스로 한 일이다.
신에게 고마움을 표시해서도 안 된다. 그것은 인간적인 아첨에 불과하다.
잘되었든 잘못되었든 모든 것이 내 탓이다.

사교(邪敎)나 사이비(似而非) 종교인에게 현혹되어 자신을 망친 사람은
모두 자기의 잘못으로 인한 것이다.
물론, 타인들을 감언이설로 현혹한 사람들도
그에 상응(相應)하는 대가를 반드시 치르게 된다.

저승과 이승의 법칙이 별반 다를 것이 없지만 조금 다른 점이 있다.
이쪽에서는 속임수가 일시적으로 통할 수 있지만, 저쪽에선 그것이 불가능하다.
이쪽에서는 법의 약점을 통해서 양심의 법을 피해 나가기도 하고
합법적으로 악행을 저지를 수도 있지만, 저쪽에선 그런 짓이 통하지 않는다.

예를 들자면,
전 두환 씨는 구국(救國)의 결단으로 광주사태를 진압했다고 주장하고,
그를 지지하는 인물들도 나름대로 당위성(當爲性)을 주장하겠지만,
그들은 결코 자신들이 저지른 행위에 대한 책임을 벗어날 수 없다.
그들은 양심(良心)의 법을 저버렸기 때문이다.
양심은 신(神)이 내린 우주(宇宙)만물(萬物)의 법칙이다.

그렇다면 그들 밑에서 그들이 시킨 이상으로 과잉 진압하여
공(?)을 세운 장교, 사병들은 책임이 없는가?
이쪽에서는 그들을 용서한다.
그러나 저쪽에서는 그냥 넘어갈 일이 아니다.
각자 자신이 저지른 만큼 반드시 갚아야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그들의 죄를 씻을 수 있겠는가?
당사자들은 스스로 그 방법을 알아내도록 노력해야 한다.
그 방법을 알아내면 이미 반 이상 갚은 것이나 다름없다.

어릴 때 읽은 책에서 어떤 부분이 생각난다.
전쟁 도중 어느 병사가 적국의 한 병사를 사살했다.
소지품을 뒤져보니 그는 외아들이었고
그를 애타게 기다리는 사랑하는 노모(老母)가 있었다.
전쟁이 끝난 후 병사는 자신이 사살했던 병사의 어머니를 찾아간다.
그는 전쟁터에서 있었던 사실을 털어놓고
자신이 죽인 병사를 대신하여 노모를 모신다는 그런 이야기다.
오래 전에 읽은 이야기가 갑자기 생각나는 것을 보면
당시에 어린 필자도 제법 감동을 받았나보다.

양심(良心)의 법을 따르면 이승에서의 죄-그 무거운 짐을 벗어날 수 있다.
그러한 것을 알면서도 외면한다면,
그 화(禍)가 자신은 물론 자손에게까지 미친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한다.

삶이 단 한번뿐이라면, 그 한번의 삶을 끝으로 무(無)로 돌아갈 수 있으면 좋으련만,
생(生)이란 그렇게 단순하지 않은 것이 우주(宇宙)의 법칙이다.

필자는 일백 네 번째의 삶을 살아가고 있다.
그 동안 어떻게 살아 왔기에 아직도 윤회에서 벗어나지 못했을까?
한심하기 짝이 없는 노릇이다.
그래서 다음 생에서도 지금의 정신 상태를 잃어버리지 않도록
정신 똑바로 차리고 살아가려고 노력하고 있다.

내가 죽어 볼 수 없어도 나의 후손들이 살아갈 것은 자명한 일이다.
내가 죽고 다시 태어나 전생(前生)의 자신을 기억하지 못하더라도
나는 반드시 존재(存在)한다.
어떤 모양, 어떤 방법으로 어떻게 존재할지는 아무도 모른다.
확실한 것은 그것을 바로 나 자신이 결정한다는 사실이다.
현세에서의 내 생각, 나의 판단, 나의 선택으로 이루어지는 나의 수준이
내 인생을 만들어 가고 있고, 그 모든 것이 나의 다음 생을 만들어 가게 된다.

예수께서도 말씀한 적이 있지만, 신(神)이 이래라 저래라 하지 않는다.
우주의 법칙아래 내가 결정하고, 내가 만들고, 내가 맺고, 내가 풀게 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신(神)은 참으로 공평한 존재(存在)이시다.
아첨한 사람들에게 특혜를 주지도 않으며,
당신을 부정했던 사람들에게도 절대 불이익(不利益)을 주지 않는다.
자신을 무지의 수렁으로 몰고 간 책임을 스스로 질뿐이다.

어제는 텔레비전에서 학원 폭력에 관한 프로그램 방영이 있었다.
중학생, 고등학교 학생들 중 상당수가 폭력 서클에 가담하고 있었다.
매스컴에서 침소봉대(針小棒大) 했는지 모르지만
필자가 지나온 시절보다 훨씬 더 심하고 행태가 고약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들은 불과 몇 년 후 모두들 후회하게 된다.
남에게 상처를 입힌 일, 남의 돈을 빼앗아 유흥장에서 낭비한 일,
용기를 자랑하느라고 자신의 몸에 칼자국을 만들고 담뱃불로 지진 자국들.
그 모든 행위가 뼈아프게 후회할 일이다.

그러나 아무도 도와줄 수 없다.
자신을 더럽힌 것, 자신의 몸에 흉터를 남긴 대가를 스스로 감당해야만 한다.
우리들의 인생에서 어느 누구도 그와 같은 법칙에서 벗어날 수 없다.
성인이 되어 처, 자식을 거느리게 되면
자신이 저지른 과오에 대한 대가를 가족에게까지 물려준다.
우리 주변에서 부모의 잘못으로 자식에게까지 나쁜 영향을 주는 것을 종종 볼 수 있다.

영혼의 타락- 양심의 법을 저버리는 일은 자손에게까지 영향을 준다.
권력욕 때문에 많은 사람을 불행하게 만든 장본인과,
그 명령에 따르던 사람들과, 그들에게 이용당한 사람들 모두
각자 자신이 저지른 무게만큼 그 대가를 치러야 하는 것이다.

우리 인생에서 예외는 없다.
어린아이들의 조그마한 폭력집단이나 구국의 결단으로
폭력을 행사한 그들이나 다 같은 법칙에서 벗어날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러한 남의 과오를 자신의 목적을 달성하는데 악용(惡用)한 사람도
그 대가를 반드시 치러야 하는 것이 하늘의 법(法)이요,
우주의 법칙(法則)이요, 양심의 법이다.

이 법칙을 자신의 영혼에서부터 깊이 깨닫고
올바른 삶을 살아가고자 하는 것이 바로 유체이탈의 목적이다.

하늘의 법은 국가도, 종교도, 종파도 뛰어넘는다.
이승과 저승, 지구를 포함한 모든 별들이 하늘의 법칙에서 벗어날 수 없으므로
우리네 인간들도 아집을 버려야한다.
특히, 종교인들은 각성해야만 한다.

왜 그런가?
바로 자신들이 하늘의 뜻을 바르게 알지 못하기 때문에 바르게 전할 수 없고,
자신들만이 선택된 사람들이란 이기적이고 건방진 생각이 자신뿐만 아니라
순진한 많은 사람들을 잘못된 길로 몰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폭풍전야(暴風前夜)같던 80년대 초(初).
서울의 한 복판에 있는 어느 고급호텔에서는 해괴한 일이 벌어졌고,
성실한 방송매체 덕분에 이름 없는 필자까지도 알게 되었다.
이름하여 “전 두환 장군과 국가를 위한 조찬 기도회.”
종교인들이 알아서 했는지, 깡패(?)들이 겁을 주어 시켰는지 자세히 알 수 없지만
제법 여러 번 그런 해괴한 장면이 보도되었던 일이 있었다.
화려한 호텔에서 밥상 받아놓고 기도하던 그들의 모습은 참으로 인상적이었다.

하늘이 내려다보고 있는데, 처, 자식이 보고 있는데,
자신이 속한 교회의 신도(信徒)들이 모두들보고 있는데,
용감하게(?) 그런 짓을 감행하였던 것이다.
교회에 다니지 않는 많은 사람들이 교회와 하느님을 싸잡아 욕했을 것이다.

어찌되었든,
그들의 비싼 기도가 통했는지,
그들의 하나님은 고급 호텔을 좋아하는지 모르지만,
그들이 빌어준 전 두환 장군은 최고의 권력을 장악했다.

그들이 하늘의 법칙을 알았더라면 그와 같은 어리석은 짓을
결단코 하지 않았을 것이다.
우주의 법칙이 얼마나 준엄한지 모르는
엉터리 목자들의 말을 믿고 따르는 이들은 불쌍하다.
신의 섭리가 얼마나 공평하고 준엄한지 모르는 자들이 신의 뜻을 가르친단다.
소가 웃을 일이다.

선민의식에 사로잡힌 이스라엘 사람들은 수 천년동안 싸우고 죽인다.
그들과 맞서 싸우고 있는 사람들도 마찬가지다.
거슬러 올라가면 그들은 같은 조상(아브라함)의 후손인데도 말이다.

아메리카 대륙을 침략하여 원주민을 학살하고,
미개한 인디언들에게 기독교를 전파하는 것이 과연 하늘의 뜻이었을까?
아프리카에서 잡아온 흑인들을 노예로 삼아
짐승처럼 부리던 자들은 기독교인이 아니었던가?
노예 해방을 반대하여 전쟁하던 이들도 모두 기독교도들이었다.

이 승만, 이 기붕, 박 마리아….
박 정희, 전 두환씨와 그를 맹종하던 인물들…
그들 대부분이 불교도나 기독교인이었다고 알고 있다.

불교가 타락했나, 기도교가 타락한 것인가?
아니다, 그들의 정신이 타락했던 것이다.
자신들의 목적과 가치가 종교적인 양심보다 앞섰기 때문이었다.
자신의 권력욕, 재물욕이 양심의 법을 이겨내지 못했던 것이다.
그리고 양심의 법- 하늘의 법칙을 외면한 것이
자신에게 얼마나 나쁜 짓을 하는 것인지 몰랐기 때문일 것이다.
그때의 그 과오가 두고두고 자신과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들을
괴롭히리라는 것을 알았다면 그들도 그 길을 선택하지 않았을 것이다.

이미 죽은 자들은 살았을 때의 고통은 별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벌써 알고 있을 것이다.
아직 살아있는 사람들도 곧 알게 된다.
머지않아 모두 죽을 운명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죽은 다음의 후회는 너무 늦다.
죽은 후에는 아무 것도 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살아 있을 때 자신이 저지른 잘못에 대한 대가를 스스로 찾아내어 치러야 한다.
남에게 보이기 위해서 전시적인 종교행사나 치르지 말고,
처절하리 만큼 자기반성을 해야 한다.

그렇게 하노라면 길이 보일 것이다.
보이지 않는 사람은 진심의 반성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당신이 뭔데 주제넘게 그런 소릴 하느냐고 할 사람도 있을 것이다.
이승과 저승을 넘나들면서 죽은 자들을 많이 만나 보았고,
그들이 어떤 경로를 가게 되는지 직접 보고 들었기 때문에 안타까워하는 소리다.

필자의 말을 믿든 말든 당신의 자유다.
필자는 내 말을 믿어달라고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필자의 경험을 토대로 당신이 직접 알아보라고 권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도 싫다면 할 수 없는 노릇이지만.

우리들 인간은 모두 죽는다.
육신이 수명을 다 하거나, 병으로 죽거나, 불의의 사고로 죽으나
일단 죽으면 영혼은 육신과 분리된다.
영혼이 머무를 집이 사라진 것이다.
어머니 뱃속에서부터 머물러온 자기의 육신-바로 그것이 아니면 들어갈 수 없다.
이것이 죽음이다.
죽음이란 산 자와 죽은 자를 갈라놓는다.
우리가 죽은 자를 볼 수도, 만질 수도, 얘기를 나눌 수도 없는 것처럼
죽은 자들도 산 자를 볼 수 없다.

음신이탈은 육신으로부터 탈출이기 때문에,
이탈 후에 만나는 사람은 모두 죽은 자들이요
건물과 물건들도 죽은 세계에 속한 것들이다.
이탈을 하여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을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구경을 한다거나, 다른 사람들이 눈치 채지 못하게 그들을 엿보거나,
사람들의 대화를 엿듣는 것이 가능하리라고 생각을 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그들의 잘못이 아니다.
유체 이탈에 관하여 조금씩 언급이 되어있는 책들이 엉터리였고,
영화나 소설 속의 얘기를 사실인 것처럼 무책임하게 써먹은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유체이탈이 투명인간으로 변하는 것이 아니다.
절대 아니다.

이 글을 읽는 사람들 중에 필자가 제시하는 방법으로
이탈을 시도하는 사람이 반드시 있을 것이다.
마음만 바르게 갖는다면 틀림없이 모두 성공할 것이다.
여러 사람이 증명해 보일 터인데 어떻게 필자가
허튼 소리를 하겠는가?

이탈이 되는 순간부터 당신은 죽은 자의 세상에 발을 들여놓은 것이다.
절대 이 세상을 마음대로 돌아다니거나 남들을 훔쳐보거나 간섭 할 수 없다.
이점을 명심하기 바란다.
유체이탈이 아닌 사술(邪術)이나 다른 방법으로 가능한지 모르지만
음신이탈로써는 불가능한 일이다.
만일 유체이탈을 하여 세계 각국을 마음대로 돌아다니며
보고들을 수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이 있다면,
거짓말을 하고 있거나 착각이나 환각이 틀림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 세상의 속된 목적을 달성하는 방법으로는 전혀 쓸모가 없단 말인가?
그렇다.
그렇다면 유체이탈이 왜 필요한 것일까?
이탈이 가능하다고 해서 초능력자 행세를 할 수 없다.
이탈의 과정을 타인에게 보여줄 방법도 없다.
염력(念力)으로 애꿎은 숟가락을 구부리고 절단 할 수 있거나
염사(염력으로 사진 찍는 것)정도는 할 수 있어야
방송에 출연해서 돈도 벌고 유명해져 초능력자 행세를 할 수 있을 것인데,
유체이탈은 그런 것과는 전혀 상관이 없다.

이른바 초능력이란 것은 전혀 얻을 수 없는 것이다.
신(神) 내린 사람들 같이 용한 점쟁이 노릇도 불가능하다.
오로지 자신의 깨달음을 위하여 사용해야 할뿐이다.
한 가지 더 할 수 있다면, 죽어서 제 갈길 몰라 헤매고 있는 떠돌이 영혼을
도와주는 일이다.

그 중에는 자신의 가족 일원이었던 이도 있을 수 있고 생면부지(生面不知)인 사람도 있다.
죽어서 제 갈 길을 찾지 못해 헤매는 사람을 아무리 많이 구제 해 주어도 생색이 나지 않는다.
신문에도 나지 않고, 상도 받을 수 없으며, 존경받는 인물이 될 수도 없다.
모두들 산 자에게만 관심이 있다.
단 한 사람만 구해도 영웅이 된다.
구제된 사람도 영웅이 된다.
삼풍백화점 붕괴 때 모두들 보지 않았는가?
안타깝게 죽어간 사람들은 외면당한다.
운 좋게 살아남은 사람은 재물도 생기고 위로도 받고 상도 받는다.

매스컴이나 정치인들은 속성상 그럴 수도 있다고 보아주지만
종교인들까지 한 다리 끼려고 하는 것을 보면 역겹다.
유명해진 어떤 사람을 구출하기 위한 작업의 여파로 소리 없이 죽어간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 불쌍한 사람들은 아무도 도와주지 않는다.
그래서 죽은 자는 불쌍하다.
가족들조차 도와줄 방법을 모르기 때문이다.
종교까지도 산 자들을 위한 프로그램밖에 없다.
왜?
죽은 자에게서는 그 대가를 받을 수 없기 때문이다.

백만 명을 여의도에 모아놓고 멋진 설교로 대중을 감동시킬 수 있는 사람도
방법을 모르면, 죽어서 갈길 몰라 헤매는 단 한사람을 구해줄 수 없다.
그렇지만 당신은 할 수 있다.
수천, 수 만 명도 구할 수 있다.
그 따위 일이 무슨 소용이 있느냐고 반문 할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런 사람은 하지 않으면 된다.
하지 않는다고 죄가 되는 것도 아니며 벌 받을 일도 아니니까.
한다고 해서 신(神)으로부터 상 받을 일도 아니다.
그저 길을 가다 만난 사람이 길을 물었을 때 아무 조건 없이 가르쳐 주는 것처럼
자신의 행위에 가치나 의미를 부여하지 않고 행(行)하면 되는 것이다.
왜?
옳은 일이니까.
필자는 그런 사람이 많아지기를 바라고 있다.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갈길 몰라 헤매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억울한 죽음을 많이 기억하고 있다.
6.25 전쟁을 전후해서 벌어진 이데올로기 싸움에서 숱한 양민이 억울하게 죽었고,
몰지각한 일부 군인들의 권력욕 때문에 광주에서도 억울한 죽음이 있었다.
관계자들의 관리 소홀, 정비 불량으로 인한 교통사고, 건물 붕괴사고,
가스 폭발 등 졸지에 억울한 죽음을 당한 사람들이 너무도 많다.
급사한 사람들은 한동안 자신이 죽은 줄도 모른다.
또, 죽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어도 한(限)으로 뭉친 사람들은
죽은 사람이 가야할 길을 가기를 거부한다.
그런 사람들도 조금만 도와주면 바른 길을 찾아 나선다.
당신이 바른 마음으로 이탈을 한다면
많은 사람을 도와 줄 수 있으니 이 얼마나 좋은 일인가?

3년 전쯤에 어떤 여인이 필자를 찾아왔다.
하얀 소복에 젊고 예쁜 여인이었다.
그녀는 무턱대고 도와 달라고 했다.

필자가 그녀에게 물었다.
『그대는 누구인데 나를 찾아와서 도와달라고 하는가?』
『저는 흉악한 무리에게 쫓기고 있습니다.」』
『무슨 일이 있었기에 이런 고초를 겪는가?』
『그 사람들은 네 명인데 형제간입니다. 저의 집 근처 작은
움막에 살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저는 마을의 양반 집 처녀였는데,
어느 날 그들에게 강제로 끌려갔습니다. 그리고 형제가 차례로 저를 욕 보였습니다.
집으로 돌아가기는 했지만 부모님께도 말씀드리지도 못하고
앓다가 결국 자결을 하고 말았답니다.
저는 원한에 사무쳐 그 불한당 사형제의 자식들을
모두 태어나자마자 모두 불구로 만들었습니다.』
『그게 언제 일인가?』
『사 백년 전의 일입니다.』
『그런데 그들이 어찌해서 당신을 따라다니는가?』
『그놈들이 살았을 때 자식들 때문에 많은 고통을 겪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죽어서 제가 한 짓이라는 것을 알아버린 것이지요.
그래서 형제가 죽어서까지 뭉쳐 다니면서 저를 찾아다녀요.
복수하려고 말입니다. 괴로워서 미치겠습니다. 무슨 방법이 없을까요?』
『어째서 그대는 명부(冥府)에 들지 못하고 떠돌아다니면서 그런 흉악한 놈들에게 쫓기는가? 』
『저는 죽어서 나쁜 짓을 했기 때문에 명부에 들 수 없답니다.』
『그렇지 않다. 누구든지 자신의 죄를 알고 뉘우치면 들어갈 수 있단다.』

그렇게 그녀와 얘기하고 있는 중 밖에서 시끄러운 소리가 들려왔다.
『어머나! 그놈들이 벌써 따라왔나 봅니다. 저는 이만 갑니다.』
처녀는 쏜살같이 달아나 버렸고 험상궂은 텁석부리의 장한 네 명이 들이 닥쳤다.
『분명히 이리로 들어가는 것 같았는데…』
저희들끼리 수군대더니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다.

착잡하기 이를 데 없었다.
그녀가 불쌍하기는 했지만 나로선 방도가 없었고,
죽은 사람이 산사람을 해칠 수 없는데
어떻게 그녀는 그것이 가능했을까 하는 의문도 생겨났다.
그 의문은 얼마 후에 풀렸지만 어쨌든 그녀를 도와주고 싶었다.
그래서 그 즉시 위로 그분을 찾아 올라갔다.
자초지종을 얘기했더니 당신이 해결해 주겠다고 하시면서
걱정 말고 돌아가라고 했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 일은 결말이 났고 그녀는 다시 찾아오지 않았다.
그녀가 어찌되었는지 확인해 볼 필요도 느끼지 않았으나 확인할 방법도 없었다.
저승에서 사람을 찾으려면 생전에 살았던 곳과 이름까지 정확하게 알고 있어야 가능한데,
나는 그녀의 이름도 살았던 곳도 모르기 때문이다.
전설의 고향 같은 프로에나 나올만한 이 이야기는 결코 꾸민 이야기가 아니다.
언젠가 아이들에게 얘기했더니
“아빠, 혹시 지어낸 이야기 아니에요?”하고 웃었다.
혹자들의 비웃음을 살수 있을지도 모르는 이 얘기를 하는 이유를
독자들께서는 잘 아실 것이다.

여러분 중에서도 유사한 경험을 하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
그분들이 참고하라고 썼지만, 일부러 그런 일을 찾아다니거나 원하지도 말기를 바란다.
그러한 일에 의미를 부여하고 그런 일들이 많이 있기를 원한다면
당신이 해결하기 힘들 정도로 몰려들 가능성도 있다.
당신이 그것을 감당하기란 결코 쉽지 않을 것이며
잘못하면 당신의 현실 생활에 지장이 있을 수도 있다.

필자는 이 일로 인해서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을 깨달았다.
우리들 산 사람들이 죽은 자를 벌 할 수 없듯이
죽은 자도 산 자에게 어떠한 영향력을 행사 할 수 없는 것으로 알아왔다.
그러나 예외가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바로 한(限)이다.
한이 맺힌 자는 그 한을 풀려고 한다.
뒷일은 생각하지 않는다.
자신의 한에 집착하고 있기 때문에 그들의 염(念力)은 엄청나게 강하다.
강한 염은 이승과 저승을 초월한다.
우리는 주변에서 그러한 사례를 많이 접할 수 있다.
때로는 지나치게 과장되거나 꾸민 얘기들도 있지만
전혀 사실무근(事實無根)인 경우는 아닌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살아서도 이런 짓을 한다.
그 때문에 흉측한 사건들로 세상이 시끄럽기도 하고
감옥은 언제나 만원이다.

우리가 이승에서 올바르게 살아야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남에게 못된 짓을 해서 한이 맺히게 해서는 안 된다.
살아서 갚지 못하면 죽어서 까지 갚아야하고
자신이 못 갚으면 후손에게까지 물려 주어야하기 때문이다.

자신의 야심을 실현하기 위해서 못된 짓을 하는 사람이 많다.
권력 때문에 많은 사람을 희생시킨 자,
재물을 위해서 남들을 울린 자,
남의 아내를 탐내어 남의 가정을 파탄시킨 자,
모두 자신이 저지른 대가를 치러야만 하는 것이다.

인과응보(因果應報)다.
불교에서 사람들을 교화시키기 위해서 그저 해본 말이 아니다.
이것은 엄연한 법칙이다.
우주의 법칙이고, 양심의 법칙이다.
이것을 외면한자들- 우선은 권좌(權座)에도 앉아보고,
재물(財物)도 뿌려보지만 그것은 잠시뿐이다.
역대 대통령을 지낸 사람들의 말로를 보면
필자의 얘기가 헛소리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는 일이다.

옛 말에 삼대(三代) 부자가 없고, 삼대 가난뱅이도 없다고 했다.
없는 사람을 위로하려고 그냥 해본 말이 아닌 것이다.
대통령을 지낸 사람이나 재벌이나 지존파나 막가파의 젊은이들도
모두 이 법칙을 외면한 대가를 결코 피할 수 없는 것이다.

이탈 후 당신은 여러 가지의 형태로 전혀 다른 모습의 인간을
만날 수가 있다. 모두 죽은 사람이지만…
많은 사람을 구제해 줄 수도 있다.
하지만, 이승에서 그러한 일들을 자랑해서는 안 된다.
잘못하면 정신병자 취급을 받을 수도 있다.
그러한 행위를 빙자하여 돈을 받는다거나, 기존의 종교 단체 안에서
새로운 파벌을 만들거나 이상한 언행을 하는 자들이 생겨날 가능성도 있다.
올바른 마음으로 행하지 않을 경우에 그런 방향으로 타락할 가능성도 있으니
이 글을 읽는 이들은 그런 사람에게 속지말기 바란다.

당신이 이탈 후에 만나는 사람은 모두 죽은 자들이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처음 이탈했을 때에는 착각을 하기 쉽기 때문이다.
필자도 제법 오랫동안 착각을 하곤 했다.

몇 년 전 전 죽은 동네친구를 만났었는데 나이도 엇비슷해서
평소에 말을 터놓고 지내던 사이였다.
몇 달 동안 보지 못했었는데 다른 사람을 통해서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의 아내가 사이비 종교에 빠져서 가산을 탕진하고
집안 꼴이 엉망이 되었는데, 결국 이혼하고 얼마 후 새 장가를 들었다.
그의 전처가 아니더라도 종교엔 관심이 없었는데,
전처 덕분에 종교라면 무조건 싫어했다.
그러한 그를 이탈 후 우연히 만난 것이다.

다른 남자 한 명과 같이 어떤 여자들 뒤를 따라가고 있었는데 필자가
불러 세우자 다른 사람들은 가고 이 친구만 마지못해 섰다.
“야! 이 사람 진배(가명) 아닌가? 참으로 오랜만이네.
그건 그렇고 정말 미안하게 되었네.
자네가 죽었다는 소식을 사 개월이나 지난 후에 들었어.
그래서 장례에도 참석을 하지 못했으니 너무 섭섭히 생각하지 말게.
그런데 자네 지금 여기서 무엇을 하고 있는가? 여기는 이승이 아닐세.
자네는 이미 오래 전에 죽었단 말이야.
사람이 죽으면 제 갈 길로 가야지 왜 헤매고 다니는가?
길을 몰라서 그러면 내가 데려다 주겠네.”
필자의 말에 그는 고개를 가로 저었다.
“난 그냥 여기서 살 거야.” 그는 짧게 대답하고 가던 길을 가려고 했다.
여자들을 따라 가고 싶은 것이다.
“잠깐만 내 말을 더 듣고 가게. 지금은 아니겠지만 조금만 더 있으면 이곳이 싫어질 것이네.
그때에는 내 말대로 하게. 조금 더 시간이 지나면 여기 있는 것이 잘못된 것이라는 사실을 느끼게 될 것일세.
그러면 가까운 산(山)으로 올라가 보게. 산 중턱쯤 올라가면 작은 집이 한 채 있을 거야.
죽은 사람을 거두어 주는 곳이지. 그곳까지 가면 자네의 일은 다 한 것이지.
다음의 일은 그 집에서 일하는 이들이 다 알아서 해 줄 거야.
찾기 힘들면 사람들에게 물어 보게. 가르쳐 주는 사람이 반드시 있을 것이네.
그리고 한 가지 더 알아 둘 일은 죽은 사람을 받아주는 집은
모두 예수의 관할 아래 있네. 자네는 살았을 때 무조건 예수쟁이를 싫어했지만,
그것은 예수쟁이들이 잘못하는 것이 많아서 그랬고
자네 잘못은 아니니 아무 염려 말고 찾아가게나.
살아서 교회에 다니지 않았다거나, 예수 믿는 사람들을 욕했다고 해서 불이익을 주지는 않는다네.
그분은 어느 누구든지 당신을 찾아오기를 바라고,
또 아무리 나쁜 죄를 지은 사람도 흔쾌히 용서하여 받아주지.
자네도 그분을 만나볼 수 있을 것이네.
그분을 만나보면 내 말이 틀리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거야.
지금까지 내가 한 말 잊지 말게.”
필자가 다짐을 하자 그는 고개를 끄덕이고서 사라졌다.

여러분들도 이와 비슷한 경험을 할 수 있을 것이다.
친구도 만날 수 있고, 먼저 간 가족을 만날 수도 있다.
여러분들도 그들을 설득하여 죽은 자가 가야할 길을 바로 갈 수 있도록 도와주기 바란다.
이것은 아주 중요한 일이다.

이탈을 한 후에 집안을 살펴보면 낯선 사람도 들어와 있다.
처음에는 놀랍기도 하고 무섭기도 하겠지만
그들이 더 무서워한다.
무작정 쫓아내지 말고 잘 설득해서 그들이 죽은 자의 길을 가도록 설득해 주기 바란다.
지금도 필자의 두려움이 완전히 사라진 것이 아니다.
그러나 처음 시작했을 때와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용감해졌다.
많은 경험을 통해서 점점 강인해 졌고, 강해지는 방법을 알아냈기 때문이다.
여러분들도 점점 강인해져 시시한 귀신 따위들을 두려워하지 않게 될 것이다.

이탈 후에 만나는 모든 사람들은 이미 죽은 자들이라는 것을 앞서도 설명을 했다.
그들 중에는 아주 악질적인 종류도 있다.
산 사람들 중에도 그런 부류가 있지만.

90년도에 필자는 동대문 종합 시장에 있었던 적이 있다.
어느 날 민방위 훈련을 한다는 방송이 있었기에,
공습경보를 하고 있는 동안 이탈을 해보기로 작정을 하고
경보 10분전에 준비에 들어갔다.
공습경보 사이렌이 울려 퍼지고 소등이 되자마자 바로 이탈을 시작했다.
이런 곳(시장)에는 어떤 종류의 망령들이 있나 알아보기 위해서였다.

이탈된 후 가게에서 나가지 않고 통로를 내다보니
열여섯 이나 열일곱 살쯤 된 여자가 걸어서 내 앞을 지나갔다.
막 지나는 순간에 그녀에게 말을 걸었다.
“얘야, 너는 누군데 죽어서 제 갈 길을 가지 못하고 이런 시장
바닥을 돌아다니고 있니?”
필자의 질문이 채 끝나기도 전에 그녀는 이빨을 드러내고 으르렁거렸다.
“아저씨는 누군데 남의 일에 간섭이야?”
험악하게 인상을 쓰고 대드는 것이 여간 악종이 아니었다.
그런 부류들은 좋은 말로 설득되지 않는다.
어울려 사는 우리들 중에서도 이런 부류의 사람들이 더러 있다.
도무지 대화가 되지 않고, 툭하면 싸우려고 대들고,
어떻게 하든지 시비를 걸어 조금만 건드리면
그것을 핑계로 돈을 뜯어내는 그런 사람들이다.

말을 더 붙였다가는 필자에게 달려들어 물어뜯을 지경이었다.
“알았다. 간섭하지 않을 테니 네 갈 길로 그냥 가거라.”
필자가 그렇게 말을 하니 그녀는 사나운 눈을 흘기며 멀어져 갔다.
좀 넓은 통로에 나서니 죽은 자들이 득실거렸다.
그들에게 말을 해보려는 순간 불이 켜지고, 사이렌이 울려 이탈은 중지되었다.

그날 밤 집에서 이탈을 한 후에 시장으로 다시 갔다.
큰 통로에 가보니 제법 많이 몰려 있었다.
거기서 일장 연설을 하니 여러 사람들이 필자를 따라 나섰다.
스물 댓 명 정도 되었는데, 원해서 가는 이도 있고
남들이 가니 덩달아 따라 나선 이들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곳에서 남아있는 자들이 훨씬 더 많았을 것이다.
필자를 따라 나섰던 이들은 지금쯤 많이 좋아졌을 것이다.
어떤 이는 죄 값을 다 치르고 이미 환생하였는지도 모른다.

87년 5월 어머니가 세상을 떠났다.
아버지께서 먼저 떠난 후 이십 년을 외롭게 살다가 떠났다.
세상 떠난 어머니를 나쁘게 말할 사람이 어디에 있을까 만은,
나의 어머니는 참으로 마음씨 착한 여인이었다.
어머니 시신을 쓰다듬으며 조용히 속삭였다.
“어머니, 못난 자식들 모두 용서 하시고 마음 편히 가시오.
아들 여섯, 딸 하나 어느 누구 하나라도 당신을 아프게 하지
않은 이 없고, 지금도 당신께 걱정을 드리고 있지만,
모두 잊고 떠나시오. 어머니는 세상에서 할 일을 다 했습니다.
다음 생에서는 아름답게 살다가 부디 윤회에서 벗어나
천국에 드십시오. 잘 가요, 어머니. “
그렇게 떠나보낸 어머니가 몇 달이 지난 후 못 견디게 보고 싶어 졌다.
삼일동안 이탈을 해 보았지만 만날 길이 없었다.
나흘째 되던 날 열여섯, 일곱 살쯤 되어 보이는 복스럽게 생긴 예쁜 처녀가 찾아왔다.
“너는 누구냐?”
“당신이 어머니를 애타게 찾기에 인도하려고 왔습니다.”
“그러면 너는 천사인가?”
“그렇다고 볼 수도 있습니다.”
“내가 보기에는 사람 같은데?”
“그렇습니다.”
“죽은 지 얼마나 되었나?”
“3년 되었어요”
“저런, 어쩌다 어린 나이에 죽게 되었지?”
“고등학교 3학년 다니다가 교통사고로 죽었어요.”
“안됐구나, 인생을 채 꽃피우기도 전에 사고로 죽다니…그래서 이런 일을 하는구나. 이런 일은 누가 시키지?”
“위에서 시키는 일이예요.”
“그래… 내 어머니가 계신 곳은 어디냐? 나를 그곳까지 인도 해다오.”
“어머니는 지금 파림촌에 머물고 있어요.”
“파림촌? 앞장서라, 어서 가 보자.”

그녀가 인도하는 먼 길을 따라갔다.
어둡고 음산한 산야를 지나 어느 곳에 당도하니 네거리가
나오고 그곳은 따스한 햇살이 환하게 비추고 있었다.
“여기가 파림촌 이라는 곳인가?”
그녀는 한쪽을 가리키며
“저쪽으로 한참 들어가면 파림촌 이예요. 그곳에 가시면 어머니를 만날 수 있을 겁니다.
저는 여기서 더 이상 갈 수 없게 되어 있답니다.”
“왜 너는 갈 수가 없지?”
“그건 말씀드릴 수 없고 저는 이제 그만 가겠습니다.”
“잠깐, 너를 다시 불러야 할 때는 어떻게 하면 되는가?”
“글쎄요, 이런 일은 없었기 때문에 모르겠어요.”
“살았을 때 너의 성(姓)이 무엇이었지?”
“진씨였어요.”
“그러면 진양이라고 부르면 되겠군. 이제 그만 가 보거라.”

그녀는 떠나고 필자는 그녀가 가르쳐 준 방향으로 갔다.
거의 다다랐을 무렵 이탈시간이 끝나고 저절로 육신으로 복귀하고 말았다.
재차 이탈을 시도했지만 헛수고였다.
이탈을 하려면 상단전에 기(氣)가 충만해 있어야 하는데,
모두 다 소비하고 없었던 것이다.
지금은 한 두 시간이상의 이탈이 가능하기도 하지만,
당시만 해도 삼십 분을 넘어서기가 어려웠다.
그녀와의 대화에 너무 많이 시간을 허비해 버린 결과였다.
다음날 단단히 준비를 하고 이탈을 했다.
지붕 위에 올라가서 소리 높여“진양”을 외쳐댔다.
그러나 기다리던 그녀는 나타나지 않고 검정양복의 사나이 두 명이 나타났다.
“당신들은 누구인가?”
“당신을 어머니께 데려다 주려고 왔습니다.”
“진양은 왜 오지 않았습니까?”
“그녀는 다른 일이 있어서 그리로 갔습니다. 자! 우리들을 따라 오십시오“
어둡고 긴 산야를 넘고 또 넘어 한참동안 그들을 따라갔다.
그렇게 해서 어느 지점에 이르자
“우리들은 여기서 기다릴 테니 가서 어머니를 만나고 오십시오.”
하고 말했다.

조금 더 앞으로 나아가니 작은 돌다리가 나왔고
그 끝에 한 여인이 다소곳이 의자에 앉아 있는데 분명 어머니였다.
어머니를 외치며 달려가 부둥켜안았다.
엉엉 울다보니 반응이 없었다. 놀라서 얼굴을 자세히 쳐다보니
분명히 어머니이긴 한데 모습이 변해져 있었다.
집에 있던 낡은 처녀 시절의 사진, 바로 그 모습이었다.
칠십 세의 노인이 죽었는데 처녀의 모습으로 변해 있다니…
그녀는 부끄러워하고 있었다.
시집도 가지 않은 열일곱 처녀를 중년의 사내가 끌어안았으니 그럴 수밖에.
놀란 마음으로 인도자들에게로 돌아갔다.
“어찌된 일입니까? 노인이 처녀로 변하다니.”
“사람이 죽으면 시간이 감에 따라 연령이 퇴행합니다. 그러다가 종래에는 다시 환생하게 되지요“
“아버지는 작고한지 이십 년 가까이 세월이 흘렀는데도
그 모습이 돌아가실 때와 거의 변함이 없었는데,
어째서 어머니는 돌아가신지 삼 개월밖에 되지 않았는데 처녀처럼 변했습니까?”
“그것은 살았을 때 공을 많이 쌓았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환생(幻生)할 기회를 빨리 주는 것입니다.”
“아버지는 살았을 때에 인자하고, 존경 받을만한 인품을 지녔었는데도 별로 변함이 없고,
어머니는 착하기만 했지 별다른 공을 쌓은 것이 없는데, 어찌된 영문입니까?”
“여자는 흔히들 생각하는 것보다 공이 크답니다. 아이를 낳고,
열심히 잘 키우고, 자식과 남편을 위해서 많은 것을 희생하고 참아냅니다.
그것만으로도 큰 공이 되지요.”
“곧 다시 태어난다니 어디서 어떻게 태어난다는 겁니까?”
“그것은 알아서 무엇 하려고 합니까? 당신을 알아보지도 못할 텐데.”
“지금 우리들의 대화, 내가 경험하고 있는 이것이
나의 환상이나 착각이 아닌 사실이란 것을 증명하고 싶어서 그렇습니다.”
“누구에게 증명하고 싶은 것입니까?”
“제 스스로에게 증명하고 싶은 것입니다.”
“그렇다면 알려 드리지요. 그녀는 미국 땅에 태어나게 되어
있습니다.”
“이름은 무엇입니까?”
“0000 부인입니다.”
“부인이라니요? 태어나기도 전에 이미 누구의 부인이 된다는 것까지 정해져 있습니까?”
“그렇습니다.”
“내가 죽기 전에 그녀를 볼 수 있을까요?”
“볼 수 있을 겁니다.”
“언제쯤 소식을 알 수 있을까요?”
“당신이 육십 오세 되면 그녀의 소식을 들을 수 있습니다.”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때가되면 자연히 알게 됩니다.

필자는 어머니를 만나보고 나서
숙명(宿命)이란 피할 수 없는 것이란 것을 새삼 깨달았다.
부부(夫婦), 부모(父母), 자식(子息).
이 관계는 태어나기도 전에 이미 정해졌다는 것이다.
특히 부부로 맺어지는 관계는 서로의 선택에 의해서 맺어지는 것 같지만,
외견상(外見上) 그럴 뿐 실제는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사람들이 이 지방에서 저지방으로 이 나라에서 저 나라로 옮겨 다니는 것이
결코 우연이 아닌 것이다.
숙명(宿命)을 이루기 위해서 찾아다니는 것이다.
제짝을 찾기 위한 행로라고 할 수가 있다.
돌이켜 곰곰이 생각해보면 필자의 말에 공감할 것이다.

왜 부부(夫婦)로 맺어 졌을까?
그것은 업(業)을 해소하기 위한 하나의 방편(方便)인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 것인지는 자명해진다.
서로 사랑하고 아끼고, 이해하고 용서를 끊임없이 반복해야만 한다.
저절로 그냥 되는 사람들도 있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많이 노력해야만 한다.
예수께서 용서와 사랑을 가르치면서 하늘을 섬기는 것 보다
오히려 더 우위에 둔 것은 그러한 이유 때문인 것이다.
다시 말하자면, 예수께서 용서와 사랑을 가르친 중요한 이유는
용서와 사랑만이 개인의 업을 해소하고 천국 쪽으로 한발 다가 설 수 있는 기회를
스스로 만들어 가는 방법이기 때문인 것이다.

결국, 용서와 사랑이란 것은 부처님의 자비심(慈悲心)과 다를 것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된다.
이렇게 얘기하면 일부 기독교인들이 사람들이 반발할지도 모르겠다.
예수께서 가르친 용서와 사랑은 인간이 그 대상이지만, 자비심은 인간을 초월하여 초목까지 그 대상이다.
왜 그랬을까?
예수님은 어쩌자고 석가보다 좁은 범위를 선택하여 주셨는가?
그것은 아마 유대민족의 정신적인 낙후(동양에 비해서)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당신의 가르침이 퍼져나갈 경로에 있는 수많은 사람들의 정신적 상태를 배려한 처사인 것이리라.
그렇기 때문에 석가와 예수를 저울질하는 사람들은 참으로 어리석은 사람들이라 아니할 수 없다.

하지만, 우리네 기독교인들은 이해(利害)에 따라 선별하여 사랑하고,
그 사랑마저도 변질시켜버렸다.
과연 누가 그 주역일까?
생각해보면 누구나 다 알 일이다.

자신의 욕망을 따라가면 파탄이 오게 마련이다.
그것은 사람을 한(恨) 맺히게 만든다.
한은 또 다시 업으로 남는다.
죄를 짓고 감옥에 들어간 사람이 그 안에서 다시 잘못을 저질러 형량이 늘어나는 것과 닮은꼴이다.
당신은 어떤 것을 택하겠는가?
그것은 오로지 당신 자신에게 달려있다.
그러면 이미 부부로 맺어진 우리들은 어떻게 살아야할까?
답은 이미 알려져 있다.
세상의 부부(夫婦)들이여 이점을 잊지 마라.

우리는 여기서 분명히 알아두어야 할 것이 있다.
전설의 고향 같은 드라마에서 보면 “명부에 들지 못하고 구천을 떠돈다.”하는 말을 자주 들을 수 있다.
여기서 “명부(冥府)”란 어디를 말하는 것일까?
사전(辭典)에 의하면 명부란 “사람이 죽어서 가야 할 곳”, 또는 “사람이 죽어서 심판을 받는 곳”이라고 정의하고 있다.
명부는 카톨릭에서 말하는 연옥(煉獄)에 해당되는 곳이다.
필자의 경험에 의하면 “구천을 떠돈다.”는 말의 의미는
사람이 죽어서 가야 할 당연한 길을 거부하고 죽은 자의 세상에서 이리저리 떠돌아다니고 헤매는 행위를 말한다.
그들(죽은 자) 나름대로 다양한 이유가 있겠지만, 정상적인 행로는 아니다.

유체 이탈 후 처음 맞이하는 장소는 내 집, 내 방이지만,
거기서 또는 거리에서 만나는 사람들은 모두가 죽은 자의 길을 거부하고 있는 망령들이다.
다시 말하지만, 이탈 후 내가 속한 세상은 같은 시간,
같은 공간에 같은 모습으로 존재하고 있어도 죽은 자의 세계다.
왜 그럴까? 왜 현실이 아닐까?
음신이탈은 자신이 죽은 것과 같은 상태로 된 것이기 때문에 이탈과 동시에 죽은 세계에 편입하게 되는 것이다.
처음에는 이세상과 모양이 같아서 현실로 착각하기 쉽다. 필자는 오랜 시행착오 끝에 그것을 알게 되었지만,
독자 여러분께서는 절대 착각하지 말기를 바란다.
명부에 들기를 거부하는 어리석은 혼령들과의 대화도 거의 불가능하니 혈연관계가 있다거나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설득하려고 하지 말아야 한다.
그렇다면 명부는 어디 있는가?
현세와 같은 모양의 죽은 자의 세상으로부터 한 단계 더 높은 차원으로 이동해야 한다.
명부라고 일컫는 곳도 다양한 모양의 넓은 세상이다.
사람들이 죽어서 제 갈 길로 갔으면 대부분 여기에 있다.
먼저 간 혈연들을 만날 수 있는 장소도 바로 이곳이다.
죽은 자의 세상에는 곳곳에 명부로 들어가기 위한 입구가 있다.
수 없이 방문해 보았는데, 산 중턱쯤에 작은 집이 있고, 죽은 뒤 누구든지 그 집으로 찾아가야만 한다.
어느 산이라고 집어 말할 수는 없지만, 여기저기 아주 많이 산재해있다.
그리고 그 집들은 모두 “예수”께서 관장하고 있다.
운이 좋으면 이탈 후 그곳에서 그분을 만날 수도 있을 것이다.

87년이던가, 그곳에서 그분을 만났을 때 필자가 물었다.
“교회에서는 예수님은 사후에 하늘에 올라 하느님의 오른편에 앉아있다고 말하고 있거나
화려하고 웅장한 옥좌에 앉아 계신다고 하던데 어찌하여 제일 낮고,
어둡고 침침한 이런 곳에서 죽은 사람들이 찾아오기를 기다리고 계십니까?”
“증거 하기 위해서 그렇다. “
“무엇을 증거 하기 위해서 입니까?”
“내가 너희들에게 한 말이 있지 않느냐.”

그 후 수십 차례 그분을 만나서 얘기도 했고, 불평불만도 털어 보았고,
울면서 하소연 한 적이 있었다.
그런 과정을 통해서 분명하게 안 것은 결코 그분은 인간사에 직접 참견을 하지 않는다는 것-
즉 그분은 인간에게 길흉을 주는 존재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았으며,
수천 년 동안 당신을 찾아오는 사람들을 위해서 문을 열어놓고 기다리고 있으며,
교회에서 말하는 것과는 다른 모습으로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몰지각한 예수쟁이들 때문에 교회에 나가지 않는 사람들도 걱정할 필요는 없다.
그들의 악선전처럼 지옥에 빠지지 않는다.
그분은 누구든지 환영하고 당신을 찾아오는 사람들은 누구나 똑같은 기회를 주고 있는 것이다.

누구든지 살았을 때 저지른 과오에 대한 대가는 자신 스스로 치르게 된다.
목자의 탈을 쓰고 신도들을 오해와 편견으로 몰아간 사람은 그만한 대가를 치러야 하고,
자신의 어리석음으로 인하여 그런 인간들에게 현혹되었던 사람들도 그에 상응하는 값을 치러야만 한다.
이러한 법칙은 현세의 법칙과 다를 것이 없다.
그렇게 자신이 저지른 무게만큼 대가를 치르고 난 다음에 다시 기회를 준다.
누구에게나 똑같은 기회가 주어지는 것이다.
그것이 환생(幻生)이다.

예수의 부활은 환생을 의미한다.
다시 인간 세상에 태어나 어떤 일을 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다.
모든 인간들은 똑같은 법칙아래 같은 기회가 주어지는 것이다.
종교, 종파, 인종을 뛰어 넘는다.
선택받은 민족도, 선택받은 종교도 없다.
모든 인류가 같은 법칙아래 다 같은 대우를 받는다.
그래서 신은 참으로 공평한 분이다.
시 인간 세상에 태어나 죄를 짓든, 선행을 하든, 모든 것이 나의 선택이다.
그래서 그분은 이렇게 말했다.
“너희가 세상에서 맺은 것은 하늘에서도 맺고, 너희가 푼 것은 하늘에서도 푼다.”

이탈을 한 후에 맞게 되는 <죽은 자의 세계>를 벗어나 더
높은 곳은 자신의 염이 상당히 강해야만 가 볼 수 있다.
명부(冥府)에 해당되는 곳은 별로 어렵지 않게 가볼 수 있으나
천국이라고 하는 곳은 내 힘만으로는 갈 수 없었다.
집중하여 노력하다보면 알 수 없는 어떤 힘이 데려다 주었다.
그곳은 명부와는 전혀 다른 모습이다.
필설로 형언할 수 없는 아름다움과 평안으로 가득 찬 곳이다.

그리고 어떤 특정한 인물을 만나거나 어떤 특정한 장소에 가려면
누군가의 도움이 있어야만 가능하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또, 우리가 이 세상에서의 가치 기준으로 인간들의 사후상태를 짐작하는 것은 어렵다.
이승에서 그럴듯해 보이던 사람도 사후에는 우리들이 예상하는 것과는
전혀 다른 모습으로 존재 할 수도 있다.
학식과 신망이 두터워 존경받던 인물이나, 신앙심이 대단해 보이거나
많은 사람들을 인도하던 종교 지도자였던 인물도 의외로 낮은 곳에서 고생하고 있거나
전혀 다른 세계에서 다른 모습으로 존재하고 있을 수 있다는 것이다.

50년대에서부터 꽤나 유명해서 수많은 사람들이 그의 수하가 되었으며,
스스로 우상화시켰던 인물이 있었다.
P씨는 아주 색다른 방법으로 자신의 종파를 부흥시키고, 엄청나게 교세를 확장했다.
한때에는 엄청난 재물과 기업과 사람들을 거느린 대단한 인물이었고,
그 때문에 더 많은 사람들이 재산을 송두리째 바치고
스스로 그의 교도가 되어 자신과 가족의 장래를 망쳐 버렸다.
그러나 세월은 흘러 그는 죽었고,
그의 교회도 서서히 무너져 지금은 그의 흔적을 찾아보기 힘들게 되었다.

몇 년 전에 이탈 중 우연히 그를 보았다.
기독교적 논리로는 그는 죽어 천국에 가 있거나, 지옥으로 떨어져야 했다.
그를 끝까지 믿고 따르는 사람들은
그가 사후에는 하느님 옆자리쯤 차지하고 있을 것이라 믿고 있을 것이고,
그에게 사기 당했다는 것을 알아채고 뛰쳐나온 사람들은
지옥에 떨어져 유황불에 타고 있을 것이라고 생각 할 것이다.
하지만 필자가 본 사실은 둘 다 아니었다.
그는 애초부터 사실을 왜곡시키고 많은 사람들을 타락시키기 위해서
어둠의 세력으로부터 파견된 인물이었거나,
어떤 연유로 그쪽의 세력과 결탁한 사람이었다.
그는 죽어서도 생전과 비슷한 일을 하고 있었다.
어둡고 침침한 곳에서 자신을 따르는 무리들을 이끄는 위치에 있었다.

이승이나 저승이나 나쁜 길로 빠져들 방법은 얼마든지 있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들이 또 하나 알 수 있는 것은,
모든 사람들이 하느님의 섭리에 따라 모두 같은 방법으로 태어나지 않는 다는 사실이다.
어둠의 세력에서도 우리와 똑같은 인간을 보낼 수 있다는 것이다.
타고난 악인, 구제불능의 악인으로 출생한 사람도 있지만,
그런 고정된 시각으로 인간을 보려하는 것은 위험한 일이다.
보통의 우리 인간들에게는 그만한 분별력이 없으며,
선과 악은 힘으로 존재하고 있고, 그 힘을 선택하는 것은 바로 나 자신이기 때문이다.

어느 날 필자가 그분에게 물었다.
“저는 천사입니까, 아니면 악마입니까?”
“너 뿐 아니라 모든 인간이 천사와 악마의 능력을 반반씩 가지고 태어났다.
네가 천사의 능력을 갖거나 악마로 되는 것은 오직 너 자신에게 달려있다.”

천사나 악마가 영화나 소설 속의 그것처럼 인간에게 간섭하지도 않으며,
또 그러한 존재는 없다는 얘기다.
순전히 내 선택에 의해서 나 자신이 잠시 천사가 되기도 하고 악마가 되기도 한다.

당신은 어느 쪽을 선택하겠는가?
당신의 선택으로 스스로 천사도 될 수 있고, 악마로 변신 할 수도 있다면.
그도 저도 아닌 멍청이도 될 수 있고.

필자가 처음 투표를 해 본 것이 70년인가 다음 해이던가
대통령 선거 때였다.
김 대중씨가 근소한 차이로 졌고, 박 정희씨가 다시 대통령이 되었다.
그 후에는 대통령을 뽑을 기회를 오랫동안 박탈당했다.
각자 이유가 다르겠지만, 식자층에서는 야당에 표를 던질 수밖에 없었다.
다른 이들의 이유는 모르지만 필자도 역시 열심히
야당에 표를 던진 사람 중의 하나가 될 수밖에 없었다.
야당이 정권 잡기를 바랐기 때문에?
아니다.
군부 독재가 싫어서?
싫긴 하지만 내 표 한 장이 바꿀 수는 없다.
야당 후보가 좋았나?
그런 것은 아니다.
그러면 왜 줄기차게 야당에 표를 던졌을까?
그것은 균형 때문이었다.
집권당에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꼭 이긴다.
정치 선진국에서도 집권당이 바뀌는 예가 거의 없는데,
우리의 경우에 그런 것을 바란다는 것은 망상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잘 알기 때문이다.
역사가 그것을 말해주고 있는데, 그것을 하려는 사람들이 있다.
바로 김 대중씨를 지지하는 호남사람들이다.
필자가 사는 동네는 저소득층이 많다.
서울의 달동네가 대부분 그러하듯이 호남 사람들이 많았다.
보통 때는 그 사람들과 어울려 사는데 전혀 불편하지 않다.
출신 도를 따질 일도 없고, 그럴 필요도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선거 때가 되면 양상이 달라진다.
호남 사람들의 바람이 거세어 지고, 타 도인에 대한 적대감이 고조된다.
억센 사람 앞에서는 함부로 말도 하기 힘들다.
김 대중씨라고 호칭했다가는 봉변당하기 십상이다.
그러면서도 그들은 “김 대중선생을 부탁합니다.” 하고 머리를 숙인다.
누가 그런 그들에게 호의를 갖겠는가?
그런 사람들을 보면서 생각했다.
김 대중씨가 대통령이 되기는 참으로 어려우리라고.
왜?
여러 사람이 나서면 나설수록 그 욕은 바로 김 대중씨에게 돌아간다는 사실을 그들은 알고 있을까?
그들이 뭉치면 뭉칠수록 여당에서 요리(?)하기가 쉽다는 것을 안다면 그렇게 하지는 않을 텐데.
절친한 호남 출신 친구에게 내 의견을 얘기했더니 처음엔 펄쩍 뛰다가 결국은 승복을 했다.
“이러한 모든 사실들을 김 대중씨나 집권당에서 알까? 모를까?” 라는 필자의 질문에
“모르겠지… 자신을 위해서 앞장서는 사람이 다른 사람들로부터 반감을 사서
도리어 역효과가 난다는 것을 알면서 어떻게 시키겠나? 아마 모르고 있을 거야.”
“이 순진한 친구야, 자네는 어찌 산전수전 다 겪은 그 양반이 그 정도도 모르리라고 생각하나?
그 양반 이미 환갑이 넘었고, 두뇌 회전이 빠르기로 유명하지 않은가?
그 주변에 서울대학교 출신의 수재들이 즐비하네.
이들이 모두 자네만큼도 생각이 못한 돌 머리라고 생각하나?”
“………………..”
“아무튼 김 대중씨가 대통령이 되려면, 지금까지의 전략을 대폭 수정해야만 가능할거야.”
“…………………….”
“자네도 알다시피 나는 경상도 출신이네.
우리 형수 네 분 중에서 두 분이 전라도 출신이지. 그분들이 낳은 아이들이 모두 여섯 명이네.
그놈들은 모두 서울에서 태어났지만 그 애들은 경상도 사람인가 전라도 사람인가, 아니면 서울 사람인가?”
“………………”
“나라꼴이 바로 되려면 우리 백성들이 정치인들의 장난에 속아서는 안 되는 것이 급선무라고 나는 생각하네.
그들의 장단에 춤을 추어주니까 가지고 놀지. 지역감정 부추기는 놈들은
여, 야를 막론하고 찍어주지 말아야해. 그들이 하는 장난을 가만히 조용히 쳐다보고 있으면, 스스로 부끄러워 그런 짓을 못하게 돼.
그건 그렇고, 내가 얘기 하고자 하는 것은 정치 이야기가 아닐세.
자네는 열심히 교회에 다니고 있고, 또 직책도 있지.
교회에서는 사람들이 예수 믿으라고 떠들고 다니라고 하나?”
“그렇지, 그것을 노방 전도라고 하는데, 성서에도 있어.”
“상가나 거리에서 전철 안에서 떠드는 사람들을 어찌 생각하는가?”
“지나치게 떠드는 것이 싫을 때도 있지만 하는 말이 틀린 것도 아니고, 또 성서에 있는 말이기도 해서…”
“그래서 옳은 일이다. 좋은 일이다. 그런 말인가?”
“그렇지.”
“노방 전도는 누구에게 하는 것인가?”
“물론 교회에 다니지 않는 사람들이 대상이겠지.”
“복잡한 전철 안에서 다른 사람 아랑곳하지 않고 예수를 믿으라고 떠들어대며, 시끄럽다고 제지하는 사람을 마치 사탄같이 대하고…
그렇게 오만하고 안하무인격인 태도가 과연 교회를 전혀 모르는 사람들을 교회로 인도 할 수 있다고 믿는가?”
“………………………….”
“자신의 행위가 도리어 반감을 가지게 하는 결과를 초래한다면, 그것은 과연 예수를 위한 일일까? 그 반대일까?”
“그런 생각은 해 본 일이 없어.”
“지금부터라도 해 보게. 어떤가?”
“글쎄, 그런 생각은 해본 일이 없어서…. 어쨌든 바른 소리를 하는 것은 사실이 아닌가?”
“김 대중 선생을 지지합시다. 하면서 외치고 다니면서 오히려
반감을 사서 역효과를 내는 행위가 김 대중씨를 도와주기는커녕 방해가 된다는 사실에는 동의하지?”
“그렇지.”
“예수를 믿으시오. 그렇지 않으면 지옥에 떨어져 영원한 고통에서 신음하고 만다는 그 외침이 오히려 역효과를 낸다면, 그래도 그 행위가 옳다는 말인가?”
“그래도 성서에…”
“성서에 전도하려면 예의를 무시하고 떠들어대라고 써 있는가?”
“……………………….”
“누가 누구에게 그런 명령을 내렸는가?”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했지.”
“그러면 전철에서 떠드는 사람들은 예수의 직접 명령을 받았을까?”
“그런 것은 아니겠지만.”
“그 사람은 예수의 제자인가?”
“………………………………”
“예수 흉내를 내어 예수가 제자들에게 명령하듯 할 수 있다는 말인가? 참으로 통탄할 일이네. 예수는 신이다. 그 점은 인정하나?”
“당연하지.”
“그렇다면 예수가 제자를 선택하였을 때 처자식을 버리고
자기를 따르라고 했었지?”
“그래”
“왜 그랬을까?”
“자신의 뜻을 널리 펴게 하기 위해서는 여러 명의 제자가
필요했기 때문이겠지.”
“물론이네. 그런데 처자식을 무책임하게 버리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큰 죄가 된다. 물론 그 죄는 버린 당사자의 것이고. 그런데 예수는 자신의 제자를 만들기 위해서 어떤 사람으로 하여금 인륜을 저버리는 죄를 짓게 했네.
어떻게 생각 하는가?”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 그 정도의 희생은 도리어 영광이 아닐까?”
“그런 얘기는 자네 같은 예수쟁이의 변명이지. 예수는 사람이면서 신이네. 당신 스스로 밝혔듯이. 그 양반(예수)은 자신의 선택 때문에 제자들이 죄를 짓게 할 리가 없네. 남겨진 처자식이 고생하면서 아버지나 예수를 원망하게 두지 않을 능력과 자격이 있다는 말이지. 예수이기 때문에 그런 일이 가능하고, 자신이 바로 신이기 때문에 그럴 수 있네.”
“그렇겠지.”
“ 그런데, 목사나 전도사들은 무슨 자격으로 사람들을 함부로
부리는가? 그들이 예수의 화신인가? 그들이 신인가? 아니면 그러한 권한을 신에게 부여받았는가?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 처자식을 버리고 교회 일에 미친 사람을 만들고, 남편과 자식을 버리고 가출하여 교회 사업에 앞장선 사람들이 적지 않네. 그들이 그런 길을 선택하도록 강요하는 이들은 누구인가?”
“………………..”
“교회를 위해서 가족을 버리거나 등한시하는 그들은 누구의 부름을 받았는가? 버림을 받은 이들과 그런 일들을 보는 친지들과 이웃 사람들은 교회나 예수를 어떻게 생각할까?
그래서 교회도 욕먹고, 예수도 외면하는 이들이 적지 않네.
그렇다면, 하느님을 위해서, 예수와 교회를 위한다는 그들이 하는 꼴이 과연 옳은 일일까? 전도의 목적은 예수 믿지 않는 사람들을 교회로 불러내서
바른길을 가르쳐줌이 아니던가?
전도를 하겠다는 사람들이 비 기독교인들이나 무종교인들에게 참뜻을 전하기는커녕 오히려 거부반응을 일으키게 한다면, 옳은 일일까 아니면 그 반대일까?”
“………………………………….”
“칭찬이 도리어 욕이 되고, 존경심을 떠벌이고 다니는 것이 모욕이 될 수도 있지 않은가? 잘 생각해 보게나 과연 내 말이 틀렸는가를…”
“………………………………….”
“오래 전에 방송에서 어떤 목사가 청량리에서 헐벗고 굶주린 이들에게 밥을 해주는 것을 잠깐 본 일이 있지. 당시에는 별생각이 없었네. 왜냐하면
그런 종류의 일은 여기저기서 그런 일을 하고 있는 이들도 많고,
대개는 어떤 목적을 위한 방편으로 사용하고 있기 때문이지.
나중에는 변질이 되더라도 그것은 당사자의 책임이 되겠지만
우선 배고픈 사람을 도와준다는 것은 좋은 일이 아니겠나.
그런데 며칠 전에 우연히 라디오를 들었는데
어떤 프로그램인지 생각이 나지는 않지만, 바로 그 목사가
초대되어 몇 마디 얘기를 하더군.
목소리를 들으니 여느 목사나 전도사들에게서 듣던 그 가식적인 뼈가 없더군. 그래서 아, 이 사람은 그래도 된 사람이구나 하고 생각했는데 그 사람이 아주 중요한 말을 하더군.
자신은 나중에라도 교회를 짓지 않겠다고.
목사의 입에서 그런 말이 나오리라고는 상상도 못 한일이었지.
매스컴을 탔으니 많은 후원자가 생길 것이고, 돈도 많이 생기겠지.
그런 후에도 변질이 되지 않는 다면 , 그 사람은 뭔가를 제대로 아는 양반이지. 나는 그 사람이 끝까지 변치 않고 돈이 생기는 대로 밥을 지어 더 많은 불행한 이들에게 나누어주기를 바라네.
그것은 여의도에 백만 명의 신도를 모아놓고 신을 찬양하고,
신도들을 감동시키는 연설을 하는 그런 행위보다 훨씬 더 고귀한 일이네. 그런 일이야말로 기독교를 전하는 가장 좋은 방법이지.”
“그런데, 자네는 어떻게 그런 일이 예수님이 진정으로 기뻐하는 일이라고 단정할 수 있나?”
“한 가지 분명히 짚고 넘어가세. 미안하지만 전형적인 예수쟁이 같은
상투적인 말투, 예수님이나 하느님이 기뻐하시는 일이라는 표현을 나는 아주 싫어하네. 왜냐하면 예수나 하느님 즉 신(神)은 인간이 자기 마음에 드는 짓을 한다고 해서 간사한 우리 인간들처럼 해해거리거나 마음에 안 든다고 해서 화를 내는 그러한 존재가 아니기 때문이지.”
“좀 전에 자네가 예수의 마음이라고 하지 않았나, 그럼 그 말은 뭔가?”
“잘 들어두게 이 예수쟁이야. 그런 것도 헤아리지 못하고 수십 년 동안 열심히 교회에 다니고 있으니. 예수는 누구인가? 대답해봐.”
“………………………………”
“이 사람 갑자기 벙어리가 되었나. 예수는 바로 신이 아닌가?
맞아? 안 맞아?”
“맞아. 바로 신(神)이시지.”
“그러면 그 양반이 뭣 하러 인 두껍을 쓰고 인간 세상에 태어났을꼬?”
“인간을 구원하려고.”
“맞았네, 아따! 거눔 신퉁허다. 고런 것도 다아네 그랴.
그런데, 그 말은 자네 같은 예수쟁이들이 하는 말이고,
정확하게 말하자면 천국에 가는 방법을 가르쳐주러 온 것이지 직접 끌고 가려고 온 것은 아니지?”
“그렇지.”
“자네 같은 예수쟁이들이 항시 들먹이는 성경에서 보세.
예수는 별 볼일 없는 사람들을 상대로 천국에 가는 방법을 가르쳐주러 왔고, 또 그랬고, 자신이 오래 머무르지 못하기 때문에 제자까지(실제로는 종이었다) 두었다. 맞는가?”
“그래”
“왜 교회에 짜잔 – 하고 나타나지 않았을까? 교회에 나타나서 기적과 위엄을 보여주고 그들을 굴복시킨 다음에 잘못된 교회부터 바로 잡고, 가난하고 불쌍한 이들을 교회로 불러들여 교회에 쌓여있는 재물로 배불리 먹여주고 엉터리 지도자들을 혼내주어 정신 차리게 했으면, 잘못된 교회도 바로 세울 수 있었을 테고, 당신도 십자가에 못 박혀 죽지 않고 장수무대에 설 수 있었을 텐데, 왜 그렇게 하지 않았을까?
이봐, 예수 믿는 자네가 말해보게. 생각할 여유를 줄 테니까.”
“에- 그것은 그렇게 할 수 있지만 하느님의 영광을 나타내는 일은 인간이 감히 헤아릴 수도 없고, 또, 깊은 뜻이…”
“됐네. 이 친구야. 모르면 모른다고 할 것이지 영광은 무슨 얼어 죽을…
그 양반이 그렇게 하지 않은 절대적인 이유가 있지. 그것은 바로 신(神)은 절대로 인간사에 직접 관여하지 않는 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이네.
인간이 천국에 가느냐 마느냐 하는 것은 스스로의 결정에 따라 철저하게 자신을 깎고 다듬어야 하는 것은 물론, 인간들은 스스로의 결정에 따라 가족 사회, 국가, 이 세상을 이루어야만 하는 숙명을 타고 태어났기 때문이네.
그 방법은 이미 오래 전부터 세상에 알려져 있네.
인간들이 그렇게 하기 싫어하는 속성 때문에 어지럽고 시끄럽고 괴로울 뿐이지. 그 양반은 새삼스럽게 그 법칙을 깨우쳐준 것일세.”
“그렇다면 굳이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실 필요가 있었을까?”
“이건 순전히 내 개인의 짐작이지만, 중국이나 인도, 한국 같은 곳에서는 이미 인간이 윤회를 벗어나 천국에 갈 수 있는 방법이 알려져 있었고,
많은 사람들이 그런 방향으로 살아가고 가르치고 있었기 때문에 그분이 굳이 와서 설명할 필요가 없었을 거야.
그분이 이스라엘을 선택한 것은 이스라엘 민족이 예뻐서가 아니라 이스라엘의 정치적 속성과 앞으로 변해갈 국제 정세 때문일 것이네.
그 분이 이스라엘에 태어나서 가르침을 펼치면,
정치가와 교회의 지도자들이 결탁해서 로마로 하여금 당신을 죽이게 할 것과 그 때문에 많은 로마인들이 당신의 가르침을 따르게 되고, 그것을 핑계로 많이 죽이고 죽고 하는 과정을 겪은 후, 정치적인 이유로 로마는 기독교를 국교로 하게 되고, 로마로부터 유럽을 비롯해서 아메리카 대륙까지 전파되고…따라서 좀더 많은 사람들이 예수의 정신과 가르침을 알게 되고, 아이고 숨 차라… 즉, 국제 정세의 흐름과 인간들의 욕심이 당신의 사상을 널리 퍼지게 할 것을 알았기 때문에 이스라엘에 태어난 것이지
유대민족이 선택받았다거나 우수한 종족이기 때문이 아니란 말일세.
예수가 이스라엘이 아닌 다른 나라에 태어났어도 똑같은 가르침을 펼칠 수 있었겠는가? 다른 나라에 태어났어도 그 가르침이 지금처럼 널리 퍼질 수
있었을까?
“…………………………….”
“이렇게 가정을 해보세. 만일 예수께서 일본이나 중국, 아니면 우리나라에 태어났다면 어떤 상황이 벌어 졌을까? 한번 생각해 보게나.”
“………………………………………..”

“그래서 예수쟁이들의 말투들- 특히 예수님이 기뻐하실 일이라는 따위의 표현이 옳지 않은 것이기 때문에 나는 싫어하네. 그러한 표현은 신을 인간의 수준으로 격하시키는 말이 된다네. 알겠는가?”
“……………………………………………………………”
“동의 할 수가 없는 모양이군. 지금은 그럴 것이네.
그러나 세월이 지나면 지금까지 한 헛소리 같은 내 말이 맞다는 것을 자네 스스로 알게 될 것일세.”

신(神)은 신이다.
인간(人間)이 아니다.
몇몇의 인간들이 부추긴다고 높아질 존재(存在)가 아니며,
몇몇의 인간들이 모욕한다고 격하(格下)될 그런 존재가 아닌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어떻게 신(神)을 대하는가?
인간과도 같은 성향(性向)을 지닌 조잡한 존재로 대한다.
누가 그렇게 대하는가?
신(神)을 믿는 사람들이다.
이 글을 보면 일부 기독교인(基督敎人)들이 펄쩍 뛸 것이다.
필자에게 욕설을 퍼부어 댈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미안하게도 나 역시 기독교인이다.
이단자로 말하고 싶겠지.
하지만 아니다.
필자야말로 진짜 예수쟁이라고 생각한다.

우리는 참된 마음으로 반성해 보아야한다.
신을 믿는다면서 신을 저질로 표현하고 있다.
신이 가장 위대한 조물주(造物主)라고 하면서 조잡한 인간에 빗대어 비교한다.
신이 불편부당(不偏不黨)한 존재라고 말하면서도 실제로는 변덕쟁이, 편협하기 짝이 없는 졸장부 정도로 평가절하(平價切下)하고 있다.
누가?
바로 우리들-기독교인(基督敎人)들이 그러고 다닌다.
이런 부분은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 천주교인들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어떤 아버지가 있었다.
아들 둘을 두었는데 큰놈은 말 잘 듣고 시키는 대로 고분고분하게 학교도 잘 다녔고 아버지의 소망대로 의사가 되어 돈도 잘 벌고 사회적으로도 인정받는 위치에 이르러 흡족하기 이를 데 없었다.

그러나 작은아들은 제 멋대로 하였다.
시키는 대로하지 않고 저 하고 싶은 일만 하고 다녔다.
가라는 법대는 가지 않고 자동차 정비에만 매달렸다.
형은 의사가 되었는데, 동생은 기름때 찌든 정비공이 되었다.
아버지는 남 보기에 창피스럽고 분해서 자식으로 인정하기도
싫었다.
그래서 있는 재산 다 털어서 큰아들에게는 병원을 지어주고
고생하고 있는 작은아들에게는 한 푼도 주지 않았다.
큰아들은 외견상 불편한 것이 없었다.
일류 대학 나와 유능한 의사가 되고, 부모의 힘으로 젊은 나이에 자신의 건물에 개업도 하고 부모도 모시고 있고, 아버지의 주선으로 돈 많고 예쁜 여자와 결혼도하였고.
그러나 그는 아버지를 존경하지 않았다.
아버지는 자신의 진로를 선택하고 강요하여 하고 싶은 일을 하지 못하게 했으며, 결혼까지 당신 마음대로 정해버려 사랑하는 사람과 결별하고
말았다.
그는 이 세상에 혼자 밖에 없었다.
동생까지 집에 오지 못하게 아버지가 막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는 아버지에게 대들 용기가 없었다.
아버지의 뜻을 거역했다가는 동생처럼 쫓겨나 좋은 집과 고급승용차, 골프채를 잃기가 두려웠기 때문이었다.
한편으로는 다행스럽기도 했다.
동생의 몫까지 자기 차지가 되었으니까.
어려서부터 자기만을 사랑해 주었고, 자신의 갈 길을 일일이 정해 주었고,
전 재산을 물려준 아버지가 그에게는 존경의 대상은 아니었다.
단지, 두려움의 대상일 뿐이었다.

작은아들도 아버지를 존경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그는 아버지를 사랑했다.
편협하지만 아버지이기 때문에 사랑했고 불쌍해하였다.
세월이 흘러 아버지는 늙어 병들고, 힘이 없어지자
큰아들 내외의 불화 때문에 함께 살수가 없었다.
큰아들은 아버지를 양로원에 돈과 함께 맡겼다.
이제는 아버지의 진로를 자신이 선택한 것이다.
이 소식을 들은 작은아들은 아버지를 모셔다가 임종 때까지 봉양하였다.

또 다른 아버지가 있었다.
그는 배운 것도 없고, 가진 것도 없어서 평생 막노동을 했다.
자식을 일곱 명이나 두었는데, 어떤 놈은 악착같이 공부해서
선생도 되고, 어떤 놈은 일찌감치 대학을 포기하고 공업학교를 나와서 취직해서 살림을 도왔고, 또 다른 놈은 학교를 중퇴하고 중국 집 배달원이 되었다가 후에 주방장이 되었고, 또 다른 놈은 어려서 가출하여 감방을 제집 드나들 듯 하였다.
아버지는 늘 마음이 아팠다.
자신의 능력이 부족해서 아이들에게 해 준 것이라고는
겨우 세끼 밥 먹여준 것 외엔 없었다.
그러나 그는 자식들을 무척 사랑하였고,
특히 일찌감치 비뚤어진 길을 가고 있는 자식을 위해
눈물로 기도하고 호소하였다.
그것은 사랑이었고 결국 사랑의 힘으로 다시 태어났다.
훗날 그는 장사로 성공하여 큰 점포를 운영하였고, 부모를 정성껏 모셨다.

첫 번째 얘기의 아버지는 재산이 많지만 자식을 편애하여 미워하는 자식에게는 한 푼도 주지 않았다.
두 번째 아버지는 물질적으로는 자식들에게 도움을 주지 못했지만 사랑으로 아이들을 길렀다.

자식을 편애하는 것은 부모로써 가장 못할 짓이다.
그것은 사랑 받는 자식과 미움을 받는 자식, 그리고 당사자까지 불행하게 만든다.
그런 사람은 어느 누구에게도 존경받지 못한다.
앞에서는 미소를 짓지만, 돌아서면 비웃게 된다. 충고해 주는 이도 없다.
그런 사람들은 남의 충고 따위는 듣지 않고 무시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기독교인들은 자신들의 하나님을 이 정도의 편협한 인물로 표현하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엄청난 착각이다.
왜 이런 지경까지 오게 되었는가?

지금도 그러하지만 기독교가 이 땅에 들어왔을 때, 전교(傳敎)의 대상이 모두 가난하고, 고달픈 인생을 사는 사람들이었다.
가난하고, 억울하고, 병들고, 힘든 삶을 사는 사람들은
나약하기 때문에 무언가 미지의 힘에 의존하여 자신의 처지가 개선되거나 반전되기를 희망한다.
현재의 처지를 당연하게 받아들이고, 억울한 일을 당해도 상대를 용서하고, 그렇게 살아가면서 자신을 깨끗하게 다스리면 죽어서 천당에 갈 수 있다고 가르치기엔 너무나 막연하고 서글픈 것이다.
그래서 그들을 위로하고자 조금씩 변형해서 가르친 것이
지금에 와서는 형편없이 왜곡된 기복 (祈福)신앙으로 변질되어 버린 것이다.

물질문명이 발달함에 따라 인간들은 점점 참된 인성을 상실해 간다.
사이비 종교나 사교(邪敎)들은 애초에 기복신앙을 미끼로 사람들을 모으고, 신도들의 재산을 갈취하고, 무지의 수렁으로 몰아넣는 악마 같은 자들이 하는 짓이지만, 기독교나 불교에서조차 기복 신앙으로 신도들을 몰아가는 것은 참으로 개탄할 일이다.

매스컴 덕분에 많은 사람들이 개화(?)되었다.
그렇기 때문에 사교 집단은 오래 버티기도 힘들고 신도들을 모으는 것이 점점 힘들게 되어 버렸다.
그래서 기독교나 불교의 탈을 쓰는 사이비 종교인이 많이 생겨났고, 자신의 욕심 때문에 잘못된 길을 가는 종교인들도 생겨나게 되었다.
일신의 부귀영달을 위하여 그런 짓을 하는 종교인들이 들끓고 있으니 천국의 문은 점점 좁아지고 있다.

사이비 종교인들은 어떤 특징이 있는가?
첫째, 그들은 반드시 기복 신앙을 조장한다.
입으로는 그럴싸한 말을 하지만, 주요 골자는 현실에서 복을 받고
행복을 누리는 것이 일차적인 목표이고, 그러기 위해서 교인들을
교회 테두리 안에 묶어두기 위해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

둘째, 성서(성경)를 교묘하게 이용한다.
성서를 이리저리 꿰어 맞추어 자신의 의지대로 해석하거나
흐름을 왜곡시키기 위해서 한 구절만 떼어내서 필요한곳에
갖다 붙인다.
특히, 신구약을 섞어 적당히 뜯어 맞추기를 좋아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신자들의 재산을 우려내는 방법을 총 동원한다.
셋째, 어떤 특정인물을 초능력자로 부각시켜 신도들의 눈을 현혹시킨다.
안수 기도, 안찰 기도 등으로 연출된 기적을 일으켜 사람들을 멍청하게 만들어버린다.
기적이 빈번하게 일어나는 교회, 그 같은 행위를 자랑하는 목사와 전도사들이 판치는 장소와 사람들은 의심해야한다.
알만한 사람들은 다 아는 얘기지만, 그런 부류들은 많은 기적을
조작한다.

실제로 기적이 일어났다 해도 그 힘이 어디로부터 오는지 확실히 알기 어렵다.
가톨릭에서는 기적이 발생하더라도 감추는 경향이 있다.
왜 그럴까?
그것을 반기고, 떠들고, 그런 능력을 지닌 사람을 흠모하는 행위는 종교의 본질을 훼손시키고, 심해지면 교회의 질서가 무너지기 때문이다.

기독교의 탈을 쓴 사이비들은 대개다 기적을 이용하며 성서를 악용한다.
성서를 가지고 자신의 행위를 합리화시키자면 한이 없다.
살인, 강도, 강간, 불륜 행위조차까지 합리화시킬 수 있다.
제발 사이비 종교인들에게 속지 말기를 바라지만 어처구니없는 일이 도처에서 일어나고 있으니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그러면 불교(佛敎)의 탈을 쓴 자들은 어떤가?
그들도 비슷하다.
특히 “나는 언제 득도(得道)했습니다.” 하는 사람이 있다면 틀림없이 사이비라고 보면 된다.
어째서 그런가?
득도(得道)의 경지를 잘은 모르지만, 진실로 득도한 사람은 그것을 자랑할 수 없기 때문이다.
득도를 했노라고 자랑하며, 신도를 모으고, 그러한 것을 기화로 치부하는 자들의 말로를 보면 알 수 있는 일이다.

필자를 아는 어떤 사람이 필자에게도 권유를 했다.
어떤 단체를 만들거나, 새로운 종파를 설립하라고.
그렇게 한다면 부귀영화를 누릴 수 있을 거라고.
그때 필자는 그에게 다음과 같이 답변했다.
“그러한 발상이 사이비로 빠지는 지름길입니다. 잘하면 부귀영화를 누릴 수도 있겠지요. 그러나 그것이 나 자신에게 얼마나 나쁜 짓을 하는지 아는 내가 어떻게 그런 짓을 할 수가 있습니까?”

유체 이탈의 목적을 설명하다보니 장황하고 어지럽다.
그러나 지금까지 읽은 분들은 목적이 어떤 것인지 확실하게 집어 낼 수 있을 것이다.

제 3장. 귀신은 있는가?
여러 사람이 필자에게 물은 적이 있다.
그때마다 필자의 대답은 “그렇다.”였다.
“요즈음 같은 세상에 귀신이 어디 있어? 다 지어낸 이야기지…” 하는 사람이 있었다.
그때 필자는 이렇게 대답했다.
“인정하든 말든 이 세상에 존재할 것은 존재하며, 존재하지 않는 것은 아무리 있다고 우겨도 없게 마련이지. 귀신이 별건가? 사람이 죽으면 귀신이지. 나도 귀신으로 변할 것이고, 당신도 마찬가지야.
다만, 소설이나 영화 속에서의 그런 귀신은 없지.”
“귀신이 있다면 어디 데려와 보쇼. 그러면 내 믿겠소.”
“증명할 방법도 없지만, 자네가 믿든 말든 나와 상관이 없네, 그런데 내가 무엇이 안타까워 자네에게 증명해주어야 한다는 말인가? 자네가 굳이 알고 싶다면 만나는 방법은 가르쳐 줄 수는 있네.”
“어디 설명해보소. 내 그 귀신을 만나보리다.”
“그러면 지금부터 내가 하는 설명을 듣고 그대로 실천에 옮기게. 내 말대로 실행한다면 오늘밤에라도 틀림없이 만날 수 있을 것이네.”
그리고 유체 이탈 방법을 설명했다.
설명이 끝나자 “에구, 무시라.”하고 부르르 떨더니 하면서 자리를 피해버렸다.

왜 우리는 귀신을 볼 수 없을까?
우리가 기(氣)를 느끼면서도 볼 수 없는 것과 같은 이치다.
귀신은 육신(肉身)이 없는 기(氣)로 존재하고 있다.
귀신이 남의 육신을 빌려 나타났다고 치자.
우리 눈에 귀신으로 보이겠는가? 보통 사람처럼 보이겠는가?
당연히 사람으로 보인다.
그래서 우리는 귀신을 볼 수 없다.
보았어도 모르고 지나가는 것이 당연하다.

그렇다면 어떻게 귀신을 볼 수 있을까?
내가 육신을 버려야만 가능한 것이다.
나도 귀신이 되어야만 그들을 볼 수 있는 것이다.

사람이 죽으면 이승과 분리되어 저승에 편입하게 된다.
저승은 어디인가?
죽은 자들의 세계를 통 털어 저승이라 하자.
이승처럼 천차만별의 세상이 그쪽에도 존재한다.

천국, 또는 천당이라 하는 곳은 제일 좋은 곳이다.
윤회의 업을 벗어난 사람만 갈 수 있는 곳이다.
선도(仙道)에서는 이곳을 동천복지라고 하며 세분하여 36동천 72복지라고 부른다.
우리들이 천국이라고 부르는 곳도 그렇게 많은 계층이
있다는 것이다.
그 아래 여러 단계의 여러 층이 존재하고 있다.

필자가 그분에게 물었더니(저쪽 세상에 가서) 크게 일곱으로 나눈다고 했다.
확인할 바는 없지만 필자가 돌아다니며 본 것은
이 세상만큼이나 다양하고 많은 곳이 있다는 것밖에 할 말이 없다.
그리고 우리가 사는 이 세상과 같은 시간에, 같은 장소에,
공존하고 있는 죽은 자의 세상이 있다.
이 세상이 물질의 세계요 양의 세계라면 여기는 음의 세계요 비 물질의 세계다.
이 세상과 똑같은 모양으로 존재하고 있다. 집도 같고, 가구도 같다.
인간이 만든 것은 그쪽에서도 등장한다. 그러나 에너지가 없다.
인간들이 만든 전기는 순간적으로 발생하고 순간에 없어진다.
그래서인지 텔레비전을 켜도 작동을 않고, 등(燈)도 켜지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밤은 무척 어둡다.
낮에는 어떨까?
낮에는 그쪽도 밝다.
태양 에너지는 지속적이라서 그런지 모르지만 죽은 자의 세상도 밝혀준다.
그 때문인지 죽은 사실을 모르는 사람들도 더러 있다.
세월이 지나면 알게 되지만 급사(急死)한 사람들은 대부분 모른다.

87년 필자가 임의로 유체이탈이 가능했을 때
길가에 우두커니 앉아있는 잠옷 차림의 중년 남자를 발견하고 그에게 물었다.
“왜 이 밤중에 길가에 나와 앉아 있습니까?”
“글쎄, 자다가 더워서 길가에 나왔는데 집을 찾을 수가 없어요. 분명히 이 근처인데…”
그는 자다가 죽은 사람이었다.
자신이 죽은 줄도 모르고 집을 찾아 헤매는 것이다.
머지않아 자신이 죽은 줄 알게 되겠지만 얼마나 헤매고 다닐지 모를 일이다.
철들지 않은 어린애들은 더 심하다.
언젠가 이탈해서 방안을 둘러보니 여자아이들 셋이 자고 있었다.
제일 큰놈은 5, 6학년쯤 되어 보이고 둘째 놈은 2, 3학년,
작은놈은 대 여섯 살쯤 되어 보였다.
“얘들아 너희들 누군데 남의 집에 들어와 자고 있나, 너희들은 형제니?”
아이들이 겁을 먹고 경계를 했다.
“괜찮아. 아저씨한테 얘기해봐.”
제일 큰놈이 입을 열었다.
“얘들은 제 동생들인데, 막내가 물에 빠져서 건지려고 하다가
함께 빠져 죽었어요.”
“저런, 불쌍한 녀석들 같으니라고… 그래, 언제 죽었는데 이렇게 헤매고 다니나?”
“5년쯤 되었을 거예요.”
“5년씩이나 갈길 못 찾고 헤매다니… 불쌍한 녀석들 같으니….
얘들아, 여기서 이러고 있으면 안돼. 하늘나라에 가면 다시 인간 세상에 태어날 수 있도록 도와준단다. 아저씨가 데려다 줄 테니 따라가겠니?”
큰놈이 고개를 끄덕였고 둘째도 별 반항 없이 따라 나서는데 막내는 앙탈부렸다.
자기가 잘못해서 그런 일이 벌어졌기 때문에 혼날까봐 겁이 나서 그랬는지, 죽은 자의 세상에서 머무는 저질인 어른들이 괴롭혀서 그랬는지 모르지만 겁을 내고 앙탈이 아주 심했다.
제일 큰놈과 필자가 양쪽에서 손을 잡고 겨우 데려다 주었는데, 필자의 손을 물어뜯고, 발버둥치고, 아무튼 대단히 힘들게 처리했던 기억이 난다.
그 아이들은 이미 환생해서 부모의 사랑을 받고 잘 자라고 있을 것이다.
필자의 바램이지만….
그 녀석들 다시 태어났으면 물을 대단히 무서워할게 틀림없다.
부모가 일찌감치 수영교실에 보내서 가르치면 물의 공포에서 벗어나게 되겠지만.

여관을 하는 친구가 있었다.
급한 볼일 때문에 외출을 해야 한다고 잠시만 봐달라고 하기에
졸지에 여관 주인노릇을 했다.
그런 곳에는 어떤 종류의 사람이 있나 호기심이 발동하여 나가 보았다.
요즈음 여관이란 곳이 여행자는 별로 없고 잠깐 동안 필요한 사람들이 많이 이용한다.
그 때문인지 한낮인데도 방마다 색정관계로 한이 맺힌 자들이 뒤엉켜 있었다.
죽은 자의 세상에는 이승 같은 부부관계도 없고, 연인 사이도 없다.
윤리, 도덕도 없고, 법도 없다.
그래서 무질서하고 엉망이요 난잡하다. 방마다 모두 그랬다.
어느 방문을 열어보니 스무 살쯤 되어 보이는 처녀가 혼자 누워있었다.
필자를 보더니 몹시도 부끄러워하였다.
“얘야, 너는 어찌해서 이런 곳에서 혼자 누워있니?”
그녀는 대답이 없었다.
그저 수줍게 웃으며 이불을 잡아당겨 얼굴을 가리려고 했다.
어떤 사연이 있는지 모르지만 난잡한 처녀는 아닌 것 같았다.
”얘야, 이런 곳에 있으면 안 된단다. 네가 어떻게 죽었는지
모르지만 이런데 있으면 못된 놈들만 만나게 된단다. 잘못이 있었으면 대가를 치르고 다시 태어나야지… 다시 태어나면 좋은 사람 만나서 사랑도하고 아기도 낳아서 예쁘게 기르고 싶지 않니? 그러자면 이곳을 떠나야한단다. 내가 데려다 줄 테니 나를 따라올래?”
그녀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고, 필자를 따라 나섰다.
심성이 착한 처녀 같았으니 이미 환생했을지도 모른다.

이성관계로 한이 맺힌 망령들은 이성을 찾아 헤맨다.
죽은 자의 세상에는 그런 망령들이 득실거린다.
숙박업소에는 그런 자들이 짝을 지어 열심히 행위를 해보지만,
만족 할 수가 없다.
그들은 육신이 없기 때문에 사정(射精)을 하지 못한다.
그래서 만족해보려고 하지만, 그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88년이던가…
어느 날 집밖에 나섰더니 군화 발소리가 요란했다.
일개 소대쯤 되어 보이는 군인들이 열을 지어 구보하고 있었다. 행색은 초라하기 짝이 없었고, 먼지를 뽀얗게 뒤집어쓰고 있었다.
맨 앞의 인솔자를 불러 세웠다.
“여보시오. 당신들 이 밤중에 왜 이렇게 떼를 지어 다니고 있소?”
“우리는 전쟁 중에 우리 진지에 포탄이 떨어져 소대 전원이 함께 죽었습니다. 어디로 가야할지도 모르고 그냥 이렇게 다니고 있어요.”
수십 명의 소대원들이 필자를 쳐다보고 있었다.
모두 피로에 지친 모습이었다.
그저 소대장 뒤만 졸졸 따라 다니고 있었다.
“여보시오 소대장, 전쟁이 끝 난지 40여 년의 세월이 흘렀는데 지금까지 갈 곳을 못 찾고 헤맨단 말이요? 참으로 한심한 일이군. 저쪽에 산이 보이시오?”
“예!”
“그리로 올라가시오. 중간쯤 올라가면 작은 집이 하나 보일 거요. 그 집은 죽은 사람을 받아주는 곳인데 그리로 가시오. 그러면 당신의 임무는 끝이요.”
그는 거수경례를 하고 나서 부하들을 이끌고 사라져 갔다.

이런 일들은 너무 많아서 이루 다 열거할 수가 없다.
독자 중에서도 이런 일을 숱하게 겪을 사람들이 생길 것이다.
처음에는 조금 어설프기도 하고, 두려움에도 떨게 될 일도
생길 것이나 실행하면서 스스로 길을 찾게 될 것이며,
두려움에서도 해방될 것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이 글을 쓰기 시작한 것이 95년이었는데, 현재의 시점은 1998년 11월 중순이다.
요즈음은 자주 이탈을 하지 않고 있다. 생업이 그리 순탄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누가 찾아오거나 주위에 있는 것을 느끼면 몸이 저절로 반응을 일으킨다.
그러면 할 수 없이 이탈을 하는데 어김없이 누군가 집안에 들어와 있다.

며칠 전인 11월 초순경에 어떤 아이가 찾아왔다.
오륙 학년쯤 되어 보이는 여자아이였다.
“얘야, 어쩐 일로 나를 찾아왔니?”
“…………………”
“너는 누구냐?”
“제 이름은 이 비례(혹은 이 미례, 미래) 라고 해요.”
“너는 언제 죽었니?”
“작년에(97년) 잠실에서 교통사고로 죽었어요.”
“그런데 왜 죽은 자의 길을 가지 않고 지금까지 떠도는 거지?”
“안돼요.”
“왜 안돼? 내가 데려다주련?”
“우리 집 전화번호가 000 국에 0000 이예요. 연락 해 주세요.”
“그래, 아저씨가 연락해주마.”
그러고 있는데 험상궂은 남자가 뒤따라와서 싫다는 아이를 끌고 가버렸다.
이런 경우 필자로선 막을 방법이 없다.
순간적으로 끌고 가버렸기 때문에 전혀 힘을 쓸 수도 없고,
해보지 않은 일이기 때문에 방법을 몰랐다.
끌려가는 아이가 싫어한다는 것은 느꼈으나 도리가 없었다.
정신이 돌아온 나는 연필을 찾아 전화번호를 적었지만
번호의 앞자리 수 하나가 아물거렸다.

아침에 비슷한 번호를 다 생각해 보고 전화를 했지만
정확한 번호는 점점 오리무중이 되어버렸고 결국 포기하고 말았다.

혹시 이 글을 읽는 독자 중에 97년 잠실에서 교통사고로 죽은< 이 비례, 혹은 미례, 미래>라는 아이를 아는 분은 필자에게 연락 바란다.
아이를 악마 같은 사내에게서 해방시켜줄 방법을 가르쳐주려고 한다.
물론, 아무런 대가를 바라지 않으며, 부모들도 그럴 필요가 없다.

이와 유사한 일로 대가를 바라며 접근하는 사람이 있으면
경계해야한다. 절대 믿어서는 안 된다.
아이가 힘든 상태에 있으니 해결해주면 좋다.
하지만 필자의 힘으로는 안 되는 경우다.
부모가 해주어야한다.

현실에 관여하는 귀신이야기

필자가 참으로 하기 어려운 얘기가 이런 종류의 귀신이다.
분명히 그런 존재들이 있기는 한데, 필자가 직접 만나 본적도 없고, 얘기해본 적도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이야기를 꺼내는 것은 분명히 존재하고 있으며
우리들의 삶에 영향을 미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필자의 어머니는 여인으로선 담이 큰 편이었고,
평소에 귀신같은 것을 전혀 믿지 않았다.
70년도에 울릉도에 한 달 동안 가 있었던 적이 있었다.
울릉도는 귀신 얘기가 참으로 풍부한 곳이었다.
재미있는 얘기도 많았고, 으스스한 얘기도 있었지만, 그저 재미로 들었을 뿐이었다.
특히, 도깨비 얘기가 많았다.
그 지방 사람들은 “허재비”라고 불렀다.

당시 이 마을에서 저 마을로 가려면 꼬불꼬불 험한 산길을 한참씩이나 걸어야했다.
대부분 사람들은 허재비에게 놀림을 당하지 않으려고
해떨어지기 전에 마실을 다녔는데, 어느 날 좀 늦게 다녀야 할 일이 생겼다.
필자는 어두워지기 전에 먼저 왔고, 어머니와 이모는
어두워진 다음에 출발하여 한밤중에 도착하였다.
그리고 한참이나 앉아서 얘기하고 있다가 어머니가 이모에게 물었다.
“참, 아까 산으로 올라올 때, 우리 앞에 조그만 아가(아이가) 앞서서 쫄랑쫄랑 걸어가더니 한참 오다가 보니 안보이데…
어느 집 아인데 밤중에 혼자 댕기노?“
어머니가 묻자 이모는 빙그레 웃었다.
“못 본 줄 알았는데, 니도 봤구나?”
“그럼, 봤지.. 늦은 밤에 왼 아가 댕기나 생각했지…”
“가는(그 아이) 가끔 나온다.”
“가끔 나온다니?”
“밤에 걷다보면 대 여섯 발자국 앞서서 한참 걸어가다가
없어져 버린다. 꼭 같은 자리에서만 나와서 움직인단다.“
“그게 누군데?”
“나도 모른다. 옛날부터 그랬다.”
“그러면, 그게 사람이 아니가? ”
“그래.”
“어마나..우야꼬… 그 아가 귀신 인가베.”
이모는 대답 없이 빙그레 웃었다
“그러면 아까 진작 얘기하지… ”
“니가 놀랠까봐 말 안 했지.”
“세상에… 그런 꼬마귀신이 있네…”
어머니는 매우 신기해 하셨다.
이모는 그 아이를 여러 번 보았다고 말씀하셨다.
정말 담이 큰 분이셨다.
그제서야 어머니는 귀신의 존재를 믿었다.

필자가 묵은 이야기를 하는 것은 그 어린아이의 혼령이
무슨 일로 사람들 앞에 자주 출현하는 것일까 생각해 보자는 것이다.
아무에게 해꼬지도 하지 않으면서 자꾸 나타나서 같은 길을
반복해서 걷는 것일까?
누군가의 도움으로 명부에 들기 위함인가?
객사한 어린아이가 부모나 집을 찾지 못하고 자신이 죽은
장소를 배회하고 있는 것일까?

졸지에 사고로 아이를 잃은 사람들이 우리 주위에도 많다.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한번 생각해 볼일이다.

어떤 남자가 있었다.
노모를 모시고 있었고 고3인 아들, 아내, 시집 간 누이.
평범한 가족이며 모두가 독실한 교인(敎人) 집안이었다.
어머니가 가실 때가 거의 되자 미리 묘 자리를 사두었다.
어머니가 당신이 묻힐 자리를 보고 싶어 해서 보여드렸더니
펄쩍 뛰면서 안 된다고 하였다.
왜 그러냐고 아들이 물었더니 무조건 그 자리에는 절대로 묻지 말고 다른 곳에 묻어달라고 하였다.
아들은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였다.
죽으면 천국에 갈 텐데 무덤이 별거냐…
얼마 후 어머니가 죽고 그 자리를 매장하려고 팠더니 물이 질퍽거리는 것이었다.
하지만 정한 것이라 강행해 버렸다.
이미 돈 주고 산 땅이고, 독실한 교인이 묘 자리를 논하는 것이
잘못된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매장하고 돌아오자마자 아주 이상한 일이 벌어졌다.
누이가 머리가 깨질 듯이 아프다고 난리를 치는 것이었다.
딸은 어머니의 소원을 무시했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들어서 오라비에게 얘기했더니 무슨 헛소리냐고 했다.
그랬더니 이번에는 느닷없이 아내가 머리가 아프다고 난리를 쳤다.
아내의 반응도 누이와 비슷했지만, 교인이 미신을 믿어서는 안 된다고 하며 무시했다.
이번에는 고3의 아들 차례였다.
아들이 산소를 옮겨달라고 애원했지만, 역시 무시해버렸다.
그 아들은 “아버지 때문에 제가 죽어요…” 하면서
3층에서 떨어져 죽어버렸다.

이것은 지어낸 이야기가 아니다.
최근이 있었던 실화다.

풍수를 논하자는 것이 아니다.
사람이 죽으면 거의 본능만 남게 된다. 교인이라도 마찬가지다.
평소에 자신의 영혼을 깨끗하게 만든 흔적 외에는 없어진다고
앞서 얘기한 바 있다.
이것은 종교와는 별로 관계가 없다. 학식과도 관계가 없다.
그것은 자신밖에 모르며, 절대 속일수도 없는 것이다.

한이 맺힌 채 죽게 버려두어서는 안 된다.
때로 한(限)은 엄청난 불행을 초래하기도 한다.
우리는 욕심 때문에 많은 사람들을 한 맺히게 하는 경우가 많다.
절대로 그래서는 안 된다.
복수는 복수를 낳는 것처럼 한은 불행을 낳고, 불행은 다시 한을 만든다.
한은 업을 만들고…

어느 날 어떤 사람이 물어왔다.
그럭저럭 살기가 괜찮은 집인데 이상한 일이 발생하였다.
자손이 귀한 집에 예쁜 딸이 출생하였다.
아들이 아니었지만, 몹시도 귀하게 길렀다.
아이는 예쁘고 총명하기 이를 데 없었다.
부모의 사랑은 물론이고 조부모의 사랑도 지극했다.
특히, 아이의 할아버지는 너무도 끔찍하게 아이를 사랑했다.
그런데, 아이가 하교에 들어갈 무렵부터 이상한 증세가 나타났다.
정신박약아의 증세가 나타나기 시작한 것이었다.
경제적으론 어려움이 없던 터라 좋다는 병원을 다녔지만 허사였다.
아이의 증세는 점점 심해져 완전히 딴 사람으로 변하고 말았다.
그때쯤 그들을 잘 아는 사람이 필자에게 문의해왔다.
무슨 그런 황당한 일이 다 있느냐고…
그 사람들도 모두 독실한 교인이다.
아이의 아버지는 어떤 사람이냐고 물었더니 아주 평범하고
순한 성품이란다.
할아버지는 어떠냐고 물었더니 성깔이 있고,
옛날에 공직에도 있었고, 주위 사람에게 정을 주지 않는데
그 아이에게만은 지나칠 정도로 애착을 가졌다는 것이었다.

6.25 전쟁을 전후해서 혹시 애꿎은 사람들을 희생시킨 적은 없는지, 재물 때문에 타인을 해한 적은 없는지 물어보라고 했다.
그랬더니 필요이상으로 반응을 하며 펄펄 뛰더라고 했다.
자신을 반성하면 혹시 길이 있을지도 모를 텐데, 역시 어렵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필자가 그렇게 판단을 했던 것은 과거 전력에 대해서 느끼는바가 있어서였다.
이런 경우 교인이라는 명분이 상황을 더 어렵게 만드는 경우다.
결국, 몇 천 만원을 얹어서 아이는 먼 지방의 어떤 시설로
보내졌고, 그들은 다시는 보지 않을 것이다.
세상의 불행은 모두 우리들이 만드는 것이다.
신이 우리를 시험하려고 장난하는 것도 아니고,
악마가 심술을 부리는 것도 아니다.
모두가 우리들 탓이요, 내 탓인 것이다.

정계에서 무소불위(無所不爲)의 권력을 휘두르던 사람들과
그 후손들의 불행을 자주 볼 수 있다.
엄청난 재산을 가졌던 사람들도 불행해지고 후손들은 다시
고난에 빠진다.
왜 그럴까?
왜 그들은 그 권력과 금력으로 좋은 일은 하지 않을까?
왜 후손들의 불행과 자신에게 다시 다가올 불행을 외면하는 것일까?
인생이 단 한 번뿐이라면 그렇게 산들 어쩔 수 없는 노릇이겠지만,
그게 끝이 아니니 문제인 것이다.

할머니의 방문.
1990년경 필자가 부지런히 유체이탈을 실행하고 있을 무렵이었다.
어느 날 꿈에 남루한 차림새의 할머니가 찾아왔다.
처음 보는 할머니였다.
“배가고파요. 나 밥 좀 주시오.”
“할머니는 뉘신데 저를 찾아와 밥을 달라고 하십니까?”
“배가 고파요. 밥 좀 주시오.”
“할머니는 후손도 없어요? 그 사람들이 제사도 지내지 않는답니까?”
“배가 고파요”
이렇게 얘기하고 있는데, 작고하신 어머니가 다가왔다.
“그 할머니가 누군지 모르겠니?”
“아, 어머니. 이 할머니는 도대체 누군데 나한테 와서
막무가내로 밥을 달라고 합니까?“
“옛날에 돌아가신 너의 친 할머니시다.”
“예? 이분이 정말 우리 할머니였어요?”
“그렇단다.”
“할머니, 이제 걱정 마세요. 형님께 말씀드려서 오늘부터 제사를 지낼게요. 만일 형수 때문에 제사를 못 지내겠다면 제가 먹을 밥이라도 드릴게요.”

필자의 조부는 전도사였다.
말이 전도사지 교회도 직책도 없는, 단신으로 전교활동을 하던 분이셨다.
가족을 돌보지 않고 단신으로 교회가 없는 타향에 가셔서 열심히 전교활동만을 하셨다고한다.
그러니 어린 자식들을 데리고 할머니 혼자 어떻게 살았겠는가?
제대로 먹이지 못한 자식들은 어린 나이에 차례로 병들어 죽어갔다.
자신과 가족마저 돌보지 않던 조부님은 일찍 세상을 떠났고,
할머니 역시 어린 자식을 두고 떠났다.

어머니는 얼굴도 보지 못한 시어머니 제사를 잊지 않았다.
그러나 어머니가 노년에 병들어 형님 댁에 들어가면서부터
제사를 지낼 수가 없었다.
형수가 다니던 개신교에서는 제사를 우상숭배로 절대 금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7, 8년을 보냈고, 어머니가 떠난 후 필자도 까맣게 잊고 있었던 것이었다.

그렇게 잊고 있었던 할머니가 필자를 찾아와 배고프다고 하는 것이었다.
이 얼마나 불쌍한 일인가?
아침에 일어나 이 황당한 사건을 형님께 전했으나
예상대로 형님은 제사를 모시지 못한다고 하였고,
필자는 부랴부랴 부족하기 짝이 없는 제사상을 올렸다.
이후, 십 년이 넘도록 기일에 제사를 지냈고, 할머니는 다시 찾아오지 않았다.
주린 배를 채우셔서 한을 풀고 명부에 들었는지
그 모습을 볼 수 없으니 다행이다.
하지만 필자의 생이 끝 날 때까지 제사는 계속할 생각이다.

제4장<전생(前生)과 윤회(輪回) >

요즈음 전생(前生) 여행이란 책이 유행이다.
전생이란 과연 있는 것일까?
무슨 TV프로 제목 같다.
TV 에서도 가끔 얘기 거리로 다루고 있고 많은 사람들이 관심을 갖지만 스스로 알기 힘든 분야다.
결론부터 얘기하자면,
물론 윤회(輪回)하기 때문에 전생(前生)도 있고 전 전생(前 前生)도 있고, 당연히 다음생도 존재한다.
믿거나 말거나 있는 것은 있게 마련이다.
필자는 지금의 생이 일 백 네 번째라는 것도 앞서 얘기한바 있다.
유체 이탈을 실행에 옮겨보는 사람은 그것이(윤회) 사실이라는 것을 당연히 알게 된다.
많은 사람들이 윤회설(輪回說) 운운 하고 있는데,
윤회설 이라고 부르는 것 자체가 윤회의 법칙을 부정하는데 에서부터
출발한다.

“환생을 한다.” “무슨 근거로 하는 소리냐, 과학적인 증명을 해 보아라.”
이런 논쟁은 하지말자.
서로를 말로써 납득 시킬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그런 논쟁은 장님끼리 귀동냥으로 얻은 지식을 토대로 생전 보지도 못하고 만져보지도 못한 코끼리의 크기나 생김새를 가지고 논쟁하는 것과 다를 바 없다.
윤회의 법칙을 몸소 겪은 사람은 논쟁하지 않는다.
논쟁으로 결과가 도출되지 않는다는 것을 잘 알기 때문이다.
누가 뭐라고 하든, 윤회는 불변의 법칙일 뿐이다.

꼭 전생(前生)을 알 필요가 있을까?
필요가 없기 때문에 우리의 기억 속에서 지워진 것이라고 단정한다.
모든 사람들이 전생을 기억하고 있다면 어떻게 될까?
아마 사회 질서가 송두리째 흔들리게 될 것이다. 아니 그보다 더 끔직한
세상이 될 것이다.

필자도 오래 전부터 전생에 대해 궁금해 왔다.
그것은 현실에서의 고통이 전생과 관련이 있지 않나 해서였다.
다시 말하면 전생에서 내가 죄를 지어서 현실에서 고통을
받나보다 하고 생각한 적이 있었고, 전생의 잘못이 있으면 그것을 찾아내 어떻게 하든 그 갚음을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여러 가지 방법을 동원해 보았지만 허사였다.
84년경 단편적으로 전생을 구경했다.
구경이 아니라 당시로 돌아가 그 체험을 다시 하게 되었다.
죽기 바로 직전의 경험이었다.
당시에 나는 변발한 중국인(中國人)이었다.
필자의 나이 스무 살 전후였고, 어떤 연유로 그런 끔직한 형을 당하는지
자세히 알 수는 없었지만, 팔 다리를 모두 잘린 채로 서서히 죽어갔다.
그 때문에 숨이 넘어갈 때까지 시간이 제법 걸렸고, 기억이 생생하게 되살아났다.
아니, 기억이 아니라 당시로 돌아가 다시 체험을 하고 있는 것이었다.
팔 다리가 잘리는 순간 아프지는 않았지만 몹시 시큰거렸다.
팔 다리가 다 잘린 몸뚱이는 수북한 시체더미 위로 던져졌으나
데굴데굴 굴러 바닥으로 떨어졌다.
양 팔과 다리가 모두 절단되었기 때문에 그렇게 될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굴러 뺨이 땅바닥에 닿았고, 다른 시체에서 흘러나온 피와 썩은 물이 뺨을 적셨다.
썩는 냄새가 코를 진동했고 의식이 가물가물 멀어져 갔다.
그렇게 하여 죽음을 다시 겪었고, 그리고 높은 하늘을 날았다.
저 멀리 아래로는 넓고 검푸른 바다를 보았다.
그것이 전부였다.

단편적인 전생 체험은 별 의미가 없었다.
전체를 다 알고 싶었다.
어느 나라에서 살았는지 어떻게 살았는지, 가족은 어떻게 되었는지, 모든 사실을 다 기억해 내고 싶었다.
그래야만 현실에서의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는 실마리를 찾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지금 생각해보면 참으로 미련한 짓이었다.
지금까지 살아온 금생(今生)의 일들도 모두 기억하지 못하는
주제에 전생을 알려고 그토록 애를 쓰다니.

금생에서의 일을 생각해보자.
10년 전에 나는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었을까?
도무지 떠오르지 않는다.
그저 크게 충격 받거나 심각했다거나 하는 중요한 사실들만
대충 떠오르고 세세한 기억은 없다.

어릴 적 필자가 걸음마를 하다가 화로에 걸터앉아 엉덩이를 덴 적이 있었다.
그 당시의 방안 풍경이 어렴풋이 보이고 내 앞에 몇 사람이
앉아 있었는데 누구인지 얼굴이 잘 생각나지 않았다.
그때가 정확하게 언제쯤인지 알 수 없었다.
서너 살쯤 되었겠지 하고 생각하다 언젠가 어머니께 물었더니
첫 돌 조금 지나서였단다.
겨우 걸음마를 하다가 화로에 걸터앉아 엉덩이를 데었지만,
흉터는 남아 있지 않다.
사실 그 정도의 어린 시절의 기억을 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런데도 필자가 기억할 수 있는 것은 워낙 큰 충격을 받았기 때문일 것이다.
너 댓 살쯤 되었을 때 형들을 따라다니며 부서진 탱크를 놀이터로 알고 들락거리던 일들도 단편적으로 기억이 날뿐이다.
그래서 자기최면으로 기억을 더듬어 올라 가보기로 작정했다.

조용한 어느 날 가부좌를 틀고 앉아서 명상으로 몰입하였다.
맑은 마음으로 들어가자 기억을 스스로 퇴행하기 시작하였다.
시간을 거슬러 조금씩 과거로 돌아가면서 잊었던 기억들이
되살아났다.
10년, 20년, 30년, 40년전…
점차적으로 아주 어린아이 시절까지 내 의지로 돌이켜 보았다.
잘 생각나지 않던 것도 보이기는 했으나,
당시의 기억이나 체험을 완벽하게 재생할 수는 없었다.
다음단계는 전생(前生)이었다.
전생(前生)으로 가자고 마음먹었을 때
나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어떤 힘에 의해서 끌려 들어갔고(깊고 어두운 터널로 빨려 들어가는 느낌), 연이어 소리도 지를 수 없는 엄청난 고통이 시작되었다.
멈출 수도 없고 피할 수도 없었다.
그냥 당하고만 있을 수밖에 없었다.
참으로 엄청난 고통이었다.
필설로는 도저히 불가능할 정도의 엄청난 고통에 휘말려 들어갔다.
굳이 표현을 하자면, 산채로 배를 가르고 내장을 토막토막 잘라내는 고통이라고 해야 하나, 생 다리나 팔을 톱으로 잘라내는 것 같기도 하고,
사금파리로 뼈를 깎아내는 듯한 고통이었다.
한동안 지속되던 고통이 끝나고 그 고통의 터널에서 빠져 나왔다.

검은 양복에 금발의 젊은 사내가 다가오더니 자기를 따라오란다.
따라갔더니 별로 크지 않은 집으로 들어갔다.
들어가자마자 내가 물었다.
“조금 전의 그 엄청난 고통의 정체는 무엇입니까? 지옥이나 연옥의 고통이 그렇습니까? 지옥이나 연옥의 고통이 그토록 엄청난 것이라면 살아서
무슨 짓이라도 할 것 같습니다. 정말 참기 힘든 엄청난 고통이었습니다.”
하고 단숨에 말을 토해냈다.
그러자 그는 말없이 명함크기의 하얀 쪽지를 내밀었다.
거기에는”ooooo ooooo”라고 적혀 있었다.
“이게 무엇입니까?”
“그것은 당신이 가지고 태어날 이름이었습니다.”
“아니, 내 이름은 김 0 0 이지 이것은 아닌데요.”
“당신은 원래 그 이름으로 스웨덴에 태어나기로 되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째서 한국 땅에 태어났지요?”
“그쪽에서 거부당했기 때문입니다.”
“거부당했다는 얘기는 무슨 뜻인지…”
“낙태 당했다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조금 전의 그 엄청난 고통은?”
“그렇습니다. 당신이 시간을 거슬러 왔기 때문에 낙태당시의 고통이
되살아 난거지요.”
“세상에! 그렇게 낙태의 고통이 그렇게 지독하다니….”

나는 경악했고, 나 자신 또한 그런 고통을 누군가에게 준 것을 뼈아프게 후회했다. 눈물을 흘리며 참회하고 속죄했다.
모르고 한 짓이지만 잘못은 잘못이요 죄는 죄다.
이 부끄러운 얘기를 하는 것은 나 같은 잘못을 저지르는 사람이 줄어들기 바라는 마음에서다.

가톨릭에서는 낙태를 준엄하게 금지했었다.
세월에 따라 약간 변질된 점이 있지만 그것은 분명히 살인(殺人)이다.
그리고 그것은 천명(天命)을 거역(拒逆)하는 행위인 것이다.

필자의 경우처럼 고통을 겪는다 해도 전생에 대해서 궁금해 하는 독자들이 많을 것이다.
전생여행이란 책을 통해서 호기심이 부쩍 일었을 것이고, 녹음테이프를 이용해서 많은 사람들이 실행해 보았지만 대부분이 실패했을 것이다.

필자의 고등학교 다니는 작은아들 녀석도 잘 안되더라고 얘기했다.
“아빠, 이거 가짜 아닙니까?”
“이거 엉터리 아닙니까?”
같은 생각을 하는 사람이 많이 있을 것이다.
“네가 전생을 알아서 어디 쓸려고 그러니? 네가 전생을 꼭 알아야만 할 절실한 무언가 있으면 내가 도와주겠지만 그런 것 같지는 않다고 본다.
그렇다면 네가 전생을 알고자하는 것은 단순한 호기심 때문이겠지…
내가 늘 하는 얘기지만 믿거나 말거나 전생은 누구에게나 있었고, 또 삶은 계속될 것이기 때문에 내 말을 믿고 너는 네 공부나 해라. 지금은 네가 그런 일에 마음 쓸 시기가 아니다.”
아들에게는 이 정도의 얘기로 진정시키고 말았다.

상대가 학생이라면 같은 얘기를 해주고 싶다.
그러나 꼭 알고 싶은 분들을 위해서 몇 마디 부언하겠다.
가장 확실하게 알고 싶으면 타인 최면이 가능한 사람을 찾아가면 된다.
테이프를 이용해서 실행하자면 방법을 조금 수정할 필요가 있다.
그 과정이 유체이탈을 실행하는 방법과 매우 닮았다.
그러나 결정적인 순간에 약간 달라져야 하고 준비상태가 조금 달라져야만 한다.
유체 이탈은 육신을 잠재워야하기 때문에 육신이 잠을 잘 준비가 되어있어야 하지만 전생여행을 하기 위한 것은 그래서는 안 된다.
즉, 자기최면을 해야 하는데, 육신이 피로해서 잠을 자려고 할 때에는 실행해 보았자 꿈속으로 빠져버린다.
따라서 전생여행을 하고 싶은 사람은 충분히 잠을 자 둔 상태에서 실행을 해야 꿈이나 환상으로 빠질 확률이 낮다.

그리고 한두 번 해보고 “에이, 엉터리구나.”하고 섣부른 결론을 내려서도 안 된다.
한번에 안 되면 두 번. 두 번에 안 되면 열 번이라도 해서 성공을 해야 하고
그 중에서 한두 번의 성공으로 얻은 결론을 진짜라고 단언해서는 더더욱 안 된다.
열 번을 성공해도 거의 대부분이 환상이나 꿈을 볼 확률이 높다.
수 십 번을 실행에 옮겨 성공을 하다보면 그 중에서 확실한 것이 잡힐 것이다.

필자도 타인에 의해서 최면을 받아 본 일은 없다.
그러나 그 방면에 많은 경험과 능력이 있는 사람의 도움을 받으면 쉽게 해결되리라는 것은 안다.
막연하게 자기최면을 하는 많은 사람들이 실패하고 실망을 할 것이다.

어떤 TV 프로그램에서 최면으로 전생의 체험을 일부분 재현하는 것을 보았는데, 그것을 다루는 제작자와 그 과정을 보면서 출연자들이 낄낄거리고, 비웃고 하는 것을 방영하였다.
필자는 그것을 다루는 사람들이 너무 경박스럽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래서는 안 된다.
시술자가 대학교수였는데 그 사람에 대한 예의로써도 그렇게 하면 안 되지만, 장난꺼리로 다룰 성질은 더더욱 아니다.
진리를 탐구하는 진지한 자세로 임해야한다.
자신의 전생을 발견한다는 것은 정신세계의 폭을 넓히는 길이다.

여기서 주의해야할 사람들이 있다.
사람들을 한 번 보고 나서 “당신의 전생은 왕자였다”, “공주였다”하고 쉽게 단언을 하는 사람들이다.
생년월일만을 가지고 전생을 운운하는 것도 신빙성이 없는 얘기다.
그리고 타인의 전생을 자유자재로 볼 수 있는 경지에 도달한 사람은 그런 말을 하지 않기 때문이다.
전생을 알기 위해서 노력하다보면 한 두 번의 삶이 아니라는 것을 누구든지 알게 된다.
전생을 깊이 파고 들다보면 언젠가는 짐승으로 살았던 자신을 발견하기도 한다고 하는데, 나는 아직 그런 경험은 없었다.
그때가 되어야 재미로 짐승을 죽이는 행위 – 사냥이란 얼마나 잔혹한 취미인지 깨닫게 된다고 한다.

남자로 태어난 것이 하늘이 내린 특권인줄 착각하여 여자를 무시하고, 학대하는 사람은 자신의 전생에서 여자로 살았던 시절이 있었다는 것을 경험해야 여자를 보는 눈이 달라진다.
자신을 무분별한 섹스의 노예로 전락시키는 짓은 스스로 축생(畜生)이 되는 지름길이란 것을 알아야한다.
백인들은 우월감으로 유색인종을 멸시하지만, 우리나라 사람들은 타지방 사람을 멸시하기 잘하고, 동족인 조선족도 무시한다.
양키는 양키라고 멸시하고, 동남아 사람들은 못산다고 무시하고 색깔이 검다고 무시한다.
전 세계 어느 민족보다 인종차별이 심한 민족이라고 누군가 그랬다.
필자도 동의하지 않을 수 없는 사례를 많이 보았다.
이 얼마나 어리석은 행위인가?

무분별한 살생을 하지 마라는 가르침이나 인과응보(因果應報)의 진리가 심심해서 해본 얘기가 아니라는 것을 가슴깊이 깨닫고 새겨야한다.
그것은 진리(眞理)요 불변(不變)의 법칙이다.
믿어라, 못 믿겠다, 하는 어리석은 논쟁은 하지 말자.
그것은 다 소용없는 짓이다.
모든 것은 스스로 느끼고 깨달아야 비로소 제 것이 된다.
남의 경험, 남의 깨달음은 자신에게는 소용이 없다.
철저하게 자신의 경험으로 올바른 깨달음을 얻어야만 그 빛을 발하는 것이다.
이러한 길로 가는 중요한 열쇠중의 하나가 유체이탈이요, 전생체험이다.
호기심으로 접근하거나 장난으로 다룰 소재가 아니란 것을 분명히 해두자.

전생을 알기 위해서 노력하는 사람들에게 필자 나름대로의 의견을 아래에 설명하니 참고하기 바란다.

우선, 자기최면을 할 줄 알아야 한다.
자기최면을 나름대로 연습해 본 사람들은 별 어려움이 없을 것이나,
전혀 경험이 없는 사람들은 최면유도 테이프로도 쉽지는 않을 것이다.
필자가 보건데 최면유도 테이프는 최면유도에 많은 도움이 된다.
하지만 초보자는 그리 쉽지 않을 것이다.
더구나 잠을 충분히 자두지 않은 상태라면 수면으로 빠지기 십상이다.
그러면 어떻게 하는 것이 좋을까?
자기최면의 경험이 없는 사람의 경우,
우선 충분히 잠을 자둔 상태에서 시작하자.
테이프를 틀기 전에 편안하게 앉아서 명상을 해보자.
명상하는 방법을 모르면 호흡을 하면서 정신을 집중한다.
우선, 편한 자세로 드러누워 호흡을 조절한다.
눈을 감은 채 시선을 코끝으로 모은다.
처음에는 눈 근육이 아플 수도 있지만 곧 숙달이 된다.
그 상태에서 자기호흡의 길이에 맞게 호흡을 하되
배나 가슴이 불룩 올라오거나 푹 꺼지도록 호흡량을 늘이면 안 된다.
아주 미약하게 숨을 쉬되 고르게 쉰다.
이때, 하나, 둘, 셋, 넷. 속으로 세어가면서 숨을 쉬어도 좋고,
정신, 통일 . 이런 구호를 마음속으로 불러가며 세어도 좋다.
중요한 것은 시선의 집중과 호흡의 정숙이다.
5분에서 10분사이면 마음이 가라앉고 어느 정도는 정신집중이 되었을 것이다.
이제는 최면유도 테이프를 틀어야한다.
최면유도 테이프의 목소리를 들으면서도 시선은 코끝에 고정시킨다.
시선을 코끝에 두는 것은 중요한일이다.
정신집중에 도움이 될 뿐 아니라 상단전에 기가 쌓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한다 하더라도 초보자가 단번에 의식을 전생까지 끌어내리기에는 충분할지는 의문이다.
개개인마다 능력과 특성이 다르기 때문에 한번에 성공할 수도 있고, 여러 번 시도를 해야 가능하기도 한다.

최면유도 테이프로 연습을 여러 번 해보아서 성공했거나
이미 자기최면의 경험이 있는 사람은 굳이 유도테이프를 사용하지 않아도 가능해진다.
우선 정신집중을 하고 호흡을 편하게 하여 호흡으로 인한
폐의 움직임이 거슬리지 않게 되면, 아주 편안하게 누운 다음에 온몸을 발끝에서부터 목까지 차근차근히 거슬러 올라가면서 긴장을 풀어나간다.
그 다음에 스스로 의식을 단계별로 퇴행해간다.
예를 들자면 10 년, 20년 이런 식으로 시간을 거꾸로 거슬러 올라가며 자신의 의식 상태를 과거로 돌린다.
의식 퇴행이 제대로 된다면 잊어버렸거나 희미했던 과거의 기억들이 또렷해 질 것이다.
금생의 기억을 거의 다 퇴행이 되었으면 전생으로 가자고 스스로 명령한다.
가장 가까운 전생으로

이 방법으로 전생에 도달하기 힘들지도 모른다.
그런 사람들은
1) 온 몸의 긴장을 풀고 근육을 차례로 이완시킨다.
2) 열에서 하나까지 거꾸로 세면서 다 세었을 때에는
팔다리는 물론 머리를 제외한 온몸의 감각이 사라지고
오직 뇌만이 살아있다고 생각한다.
(잘되지 않았으면 반복한다. 계속 반복 하다보면 실제로 다른 부분의 감각은 거의 느낄 수 없는 상태에 도달하게 된다.)
3) 눈앞에 이십 계단이 나타난다고 생각하라.
그 계단을 하나씩 내려가면 맨 아래에는 문이 있다.
그 문은 전생으로 들어가는 관문이다.
이렇게 암시하고 나서 계단을 하나씩 천천히 세어가면서
내려간다.
4) 눈앞의 문을 열고 들어가면 전생으로 들어간다고 암시하면서 문을 열고
들어간다.
5) 지금까지 보지 못한 광경이 눈에 보이면 자신의 손, 발등을 살펴본다.
6) 남자인지 여자인지를 자세히 살펴본다.

사실 필자의 경험을 토대로 설명을 하고 있지만 그리 쉬운 일은 아니다.
한두 번의 시도로 성공하기는 쉽지 않다.
전생체험도 여러 번의 시행착오를 겪어야 가능한 것이다.
여러 차례 시도하다보면 자신에게 적합한 방법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필자는 평소에 남자는 남자로 여자는 여자로 태어날 가능성이 많다고 막연하게 생각하였고. 그전에 간간이 경험했던 전생의 기억들은 한결같이 남자였고, 연대가 제법 오래된 것이었다.
그러나 새로운 마음과 각오로 자세히 알아보려고 시도하니 새로운 사실을 알 수 있었다.
필자는 1951년생이다.
가장 가까웠던 전생은 1949년에 사망한 것이었다.
1949년에 사망하고 1951년에 환생한 것이다.
사망 후 환생하기까지의 시간이 고작 이년밖에 되지 않는 것이다.
최소한 삼사십 년에서 수백 년까지의 긴 시간이 걸릴 것이라고 생각했던 고정관념이 무너졌다.
더 놀라운 일은 당시의 나는 여자였던 것이었다.
혹시 잘못 들어갔던 것은 아닐까하는 생각에 십 수 차례 시도하여 확인해보았지만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기다란 여성특유의 팔과 손. 다리와 발의 모양. 틀림없는 여성의 모습이었다.
국적은 확실히 알 수 없었고 불어와 이태리어를 사용하고 있었는데, 무슨 얘기를 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현재의 의식이 작용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남편이 있고, 딸이 둘 있었는데, 젊은 나이에 불행한 시절을 보내고 불행한 방법으로 죽는다는 것을 알았을 뿐이다. 더 이상의 접근은 어려웠다.
자기최면의 한계가 아닐까 생각이 들었다.

TV에서 보는 타인최면과는 다른 면이 있었다.
어찌되었든, 가장 가까운 전생에 내가 여자였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내게는 충격이었다.
그로 인해서 여자를 보는 눈이 달라졌다.
독자여러분들 중에서도 자신의 성(性)이 달라진 것을 경험하는
분들이 있을 것이다.
그렇다 하더라도 현재의 내 인생이 크게 달라질 것은 없다.
다만, 좀더 상대방을 이해할 수 있는 여유가 생기지 않을까 한다.

스스로 전생을 확인하는 것이 쓸데없고 허무맹랑한 행위는 아니다.
하지만 신비로운 어떤 세계를 탐험한다거나, 초능력을 갖게 되는 것은 아니다.
전생을 알게 된다는 것은 정신세계에 대한 아주 작은 열쇠를 갖는 것에 불과하다.
자랑 할 일도, 자부심을 가질 일도 아닌 것이다.
그저 원래 있던 여러 가지 현상 중 지극히 일부를 발견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아야한다.

<잡담>
A는 독실한 기독교(개신교) 신도다.
어느 날 A가 물었다.

“전생이 어디 있소? 성경에는 그런 말이 없는데…“
“성서가 전부는 아니외다.”
“성서가 전부가 아니라니요? 그런 불경(不敬)이 어디 있소?”
“전생이 없다고 생각하십니까?”
“전생이 어디 있어요? 사람은 하나님이 창조했고,
단 한번뿐인 인생이기 때문에 우리는 열심히 주님을 믿고,
죽어서는 천국에 들어간답니다.“
“하느님은 인간을 사랑한다고 하였는데, 또 공평하신 분이라고
하였는데, 같은 처지에 처한 인간은 하나도 없습니다.
당신들의 논리에 의하면 하느님은 지독한 심술쟁이에다가
욕심쟁이요.“
“아니? 무슨 그런 불경스런 소리를 합니까?”
“세상에는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고통 없이 편하게 살다가
가는 사람도 있고, 부귀영화를 누리는 사람도 있고,
장애자로 태어난 것도 서러운데 세상에 버려져 모진 고통을 받다가 굶어 죽는 이들도 있소. “
“그래도 하느님의 똑같은 축복으로 태어났습니까? 당신들이 말하는 하느님의 축복이란 자신들만이 선택되었다는 이기심,
자만심의 부산물일 뿐입니다. 만일 당신이 아프리카의 가난한
나라에 태어나 질병과 기아의 고통으로 죽어 가는 수많은
아이들을 본다면, 더구나 당신도 그 중의 하나라고 한다면
하느님의 축복으로 태어났다는 말은 감히 하지 못할 것입니다.”
“……………………………”
“교회의 역사를 아십니까?”
“……………………………”
“성서가 언제 씌어 졌는지 아십니까?”
“……………………………”
“성서가 언제 누구에 의해서 씌어 졌는지도 모르면서 걸핏하면 성서를 들먹입니까, 당신네 목사에게 물어보면 믿음이 부족해서 엉뚱한 의문을 품는다고 할지도 모르겠으니 내 말해주리다. 가장 중요한 예수의 행적이 사복음서에 나와 있는 것뿐이니 사복음서에 대해 얘기해봅시다.
사복음서는 누가 썼는지 아십니까?”
“마태오, 누가(루까), 마가(마르꼬), 요한이 아닙니까?”
“흔히들 그렇게 알고 있지만 사실은 그것과는 다르답니다.
예수께서 살았을 때에 숨죽여 지내던 사람들이 삼사십 년이나 지난 후부터 예수의 언행을 기록하기 시작하였고, 많은 사람들이 글을 남겼는데, 불행하게도 모두 작자미상 입니다.
그리고 당시 유대사회에서는 히브리어를 몰라서 헬라어(고대 그리스어)로 기록되었는데, 헬라어를 아는 사람들은 모두 상류 계급이나 랍비등 지식인층이었습니다.
비슷한 연대 우리의 경우를 보면 이해하기 쉽겠지요.
우리는 한자를 사용하였고, 한자를 잘 이용할 수 있는 사람들은 소수의 지배계층이었습니다.
예수를 존경하던 그들이(성서 원작자) 예수 사후 삼사십 년이나 지난 후부터 글로 남긴 것은 그들이 늙어 죽을 때가 가까워졌기 때문에 썼거나,
그 얘기를(예수의 행적) 전해들은 후세들이 썼기 때문에 나중에 쓴 것은 거의 백년이 지난 후였습니다.
무엇이 겁이 났던지 그들 모두 자신의 이름은 남기지 않았습니다.
예수의 행적을 기록했던 것도 있고, 말씀만 기록했던 것도 있는데, 말씀만 기록했던 것을 어록(語錄)이라고 합니다.
당시까지 일정한 형식 없이 집회하던 교회는 문서로 된 책이
절실하게 필요했을 것입니다.
당시 초기교회의 지도자들이 전해져오는 여러 가지 문서들을 취합하고 교정하여 신약성서를 만들었는데,
마태복음, 요한복음, 하고 임의로 정한 것입니다.
이것이 4세기경입니다.
예수가 죽은 후 거의 400 년이 흘렀을 때 교회의 지표인 성서가 완성된 것입니다.”
“그것을 어떻게 압니까?”
“역사적(歷史的) 사실로 기록되어 있기 때문이지요. 내 말이 터무니없는 것이라고 생각이 되면 양심 바른 목사에게 물어보십시오.
그들도 신학교에서 공부했으니 알고 있으니 부인(否認)하지는 못할 것입니다. 그런 의심을 품는 것은 믿음이 부족해서라고 얼버무릴 가능성도 있습니다.”
“그러면, 구약성서는 어떻게 된 것입니까?”
“구약성서는 읽어봐서 잘 알겠지만, 중요한 것은 유대민족의 역사서라는 점입니다. 고대 히브리 문자가 언제부터 사용되었는지 모르지만,
대부분 구전(口傳)되어 내려오던 것을 후대에 문자로 기록된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생각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예수탄생이 약 2000년 전인데, 당시 우리는 삼국시대 초기에서 중기로 넘어갈 무렵이었습니다. 물론, 우리나라에도 글이 없었습니다.
2000년 전, 지구상에서 어떤 민족이 문자를 사용하고 있었을까요?
당시에도 한반도에 삼국은 존재하였지만, 당시에 씌어진 역사는 없습니다.
모두가 훨씬 뒤에 기록된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수탄생이전에 기록되었다는 구약성서는 고대 히브리어로 기록되었다고 하는데, 언어는 히브리어를 사용했겠지요.
그러나 히브리 문자로 기록되었다고 하는 주장에는 상당한 의심이 갑니다.
고대 히브리문자가 언제부터 사용되었는지 모르지만, 그 형태가 상형문자 수준을 넘지 못한 것은 사실입니다. 또 종이가 없었던 시절이라서 양피지에
기록되었다고들 하는데, 어떤 재료로 기록 할 수 있었을까요?
먹물도 잉크도 없었던 시절인데… 의문은 끝이 없습니다.
구약성서의 그 방대한 양을 보십시오. 그것을 미개한 문자로 양피지에 썼다면 그 양이 도대체 얼마나 되겠습니까?
어마어마하게 많은 분량이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이 세계 어디에도 그만한 원본 성서는 없습니다.
우리의 유산인 팔만대장경을 우리 글로 번역해서 성경과 같이 깨알 같은 글씨로 책을 만든다고 가정을 해 봅시다.
그 책의 두께가 성경보다 두꺼울까요, 더 얇을 까요?
한번 생각해 보세요. 재미있을 겁니다.
그리고 그런 고대문자는 우리의 한글처럼 말을 문자로 똑같이 표현하지는 못합니다. 우리가 밀접하게 사용하는 영어를 예로 들어보십시오. 한 가지 문장을 여러 가지 다른 문장으로 번역 할 수 있게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한 자, 한 획이라도 틀리면 큰 불경이나 저지르는 것처럼 올가미를 씌운 그 자체가 이미 큰 오류를 범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글쎄요.”
“성서만을 가지고 교회를 운영하다보면 심각한 오류에 빠질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 때문에 초기 교회의 운영자들은 전례를 만들었습니다.
미사(MISA)가 그것이지요. 미사 중에 최후의 만찬 때 예수의 메시지를 재현하고, 신자들이 그 행위에 참가함으로써 좀더 깊이 예수에게 다다가는 기회를 만들어보자는 것이지요.
왜 예수의 메시지를 중요하게 여기느냐, 왜 최후의 만찬과정을 재현 하면서 까지 그분의 사상을 미사의 중심으로 만들었을까요?
그것은 예수의 사상이 인간들이 가야 할 길을 올바르게 제시하였기 때문입니다. 개신교의 예배처럼 성서를 중심으로 집회를 하게 되면,
인간들의 욕심에 의해서 성서의 내용이 왜곡되기 쉽기 때문입니다.
“형식이 없는 것은 내용도 없다”는 말이 있듯이 일정한 형식을 만들고, 그 형식에 계속 참여함으로써 참뜻을 전하는 것이 성서만을 붙들고 늘어지는 것보다 오류에 빠질 확률은 낮은 것이지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
“성서가 채택된 것이 불완전하기 때문에 가톨릭 내부에서는 그 후에도 계속해서 논란(論難)이 일어났습니다. 그러다가 중세에 와서 논란 끝에 처음의 결정을 그대로 존속하는 것이 옳다는 결론으로 지금에 이른 것 입니다. 지금 가톨릭에서 사용하고 있는 성서는 이런 우여곡절 끝에 만들어진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가(개신교) 사용하고 있는 성경은 어떻게 만들어졌는데요?”
“이런, 당신이 하느님의 말씀이라고 지극히 섬기는 성경이 어떻게 시작되었는지도 모르고, 지금 사용하고 있는 성서가 누구에 의해서 번역되었는지도 모르다니… 어찌되었든, 개신교의 성서는 특이하게도 교회가 들어오기 전에 이미 번역되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1882년 만주에서 전교 활동하던 존 로스(John Ross) 목사와 평신도인 이응찬, 백홍준에 의해서 <누가복음>이 번역되었고, 1887년에 <예수성교전서>가 발행되었으며,1883년 일본에서 개신교인이 된 이수정이 <현토 한한 신약성서>를 발행하였답니다.
1882년 한미조약에 의해서 미국 선교사들이 들어왔는데,
그때 이미 국어로 번역된 마가복음을 가지고 들어왔다고 합니다.
1887년에 조직된 성서번역위원회에서 1900년 신약성서를
발행하였고,1911년에 구약성서를 간행하였으며, 지금의 성경전서는 1956년에 개정하여 발행한 것이랍니다. 당시의 과정이 헬라어를 번역한 것인지 라틴어인지, 영어나 불어를 번역한 것인지 알 수는 없습니다.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외국어를 한글로 번역을 하는데 있어서 완벽한 것은 있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자면 우리는 예수를 호칭할 때 “주님!”으로 번역했는데. 영어는 MASTER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당시(예수 생존시)의 상황으로 보아 영어로 번역한 것이 옳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주님”으로 번역하지 말고 “주인님”으로 하는 것이 원문에 더 가깝다고 생각됩니다. 우리의 정서로 보아 주인님으로 번역한다면 조금 다른 느낌이 들것입니다. 기도할 때 “주인님”으로 호칭해 보십시오.
아마 그 때문에 “주님”으로 정했을 것입니다.
이런 일례만 보아도 성서의 한 구절이나 단어에 매달려 왈가왈부하는 것은 본말이 전도될 가능성이 많습니다. 다시 말하자면 예수께서 우리 인간들에게 전하고자했던 뜻을 정확하게 알고 싶으면 성경의 어느 한 구절에 매달리지 말아야하며 특히 구약성서와 연결은 위험한 일입니다.
구약성서는 그 옛날 무지몽매(無知蒙昧)하기 짝이 없는 백성들을 대상으로 만들어 졌고, 수천 년 구전(口傳)되어 내려오는 동안 조금씩 변형이 되었을 가능성이 있고, 그 후 문자(文字)가 생겨나 기록된 것 역시 상형문자(象形文字)의 수준이라 예나 지금이나 정확한 해석이 어렵습니다.
이러한 과정으로 볼 때 어느 한 구절을 강조한다거나
신약성서와 연계시켜 해석하는 것은 문제가 많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이비 교인들이 신, 구약을 이리저리 갖다 붙여 마음대로 해석하여 신자들을 현혹하고 우롱하고 있습니다.
내가보기엔 개신교, 특히 우리나라의 개신교는 아주 문제가 많습니다.
정도의 차이일 뿐 거의 다 조금씩은 성서를 잘못 해석하고, 잘못 가르치고 있습니다. 밑천이 성서밖에 없으니 그것을 최대한 이용해서 교회를 꾸려나가야 하는데, 올바른 해석으로 바른말을 하면, 운영이 되지 않는 것입니다. 바른말을 하고, 정직하게 가르치자면 운영자들이 가난하게
살아야 가능한데, 그것이 참으로 어렵기 때문입니다.”
“말씀을 듣자하니 천주교를 옹호하는 것 같은데 혹시 천주교인이 아닙니까?”
“부인하지는 않겠습니다. 나는 어렸을 때 교회를 다녔고, 철들면서 천주교인이 되었고, 무언가를 조금 알게 된 지금 진짜 예수쟁이가 되었습니다. 천주교에도, 개신교에도 속하지 않는 예수쟁이지요.
천주교 내부에도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것은 대개 그 구성원 중 일부가 잘못하고 있는 것이기 때문에 교회의 구성이나 운영에 대해서는 할말이 없습니다. 개신교와 천주교의 가장 큰 다른 점이 무엇인줄 아십니까?
목사는 결혼 할 수 있지만, 신부나 수녀는 그것이 허용(許容)되지 않는 것입니다. 교회를 운영하는 사람들이 개인 재산을 만들 필요가 없기 때문에 개신교만큼 부패하지 않는 것입니다. 천주교도 초기에는 신부들이 결혼을 했습니다. 교황도 결혼했고, 심지어는 4대를 연이어 교황 자리를 물려 준 적도 있었지요. 당연히 부패 할 수밖에 없었지요.
성직자의 결혼이 교회운영에 도움이 전혀 되지 않는다는
판단이 섰기 때문에 당사자들이 자신들의 결혼을 금지시켰고,
지금에 이르렀습니다. 성직자 자신들이 스스로 발목에 족쇄를 채운 것이지요. 대단한 결단이지요?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지금이라도 신부, 수녀들이 결혼한다면 천주교도 멀지 않은 장래에 붕괴되고 말 것입니다.
개신교가 하나 되지 못하고 마치 장사꾼처럼 큰 점포도 있고,
작은 것이 있는 것은 이런 이유 때문입니다.
재산이 많은 자와 가난한 자가 힘을 합쳐 공동의 재산으로
등록 할 수 있습니까? 중세 때 개신교의 파생도 이런 인간들의 이기심과 소유욕이 만들어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학교 다닐 때 마르틴루터가 종교 개혁을 했고, 그 이유는
교회가 면죄부를 팔아서 돈을 끌어 모으는데 반대했기 때문이라고 배웠는데요.”
“조금 잘못 알고 계시는군요. 저도 중학교 다닐 때 세계사 시간에 그저 그런 정도로 배웠으니 잘못 알고 있는 것도 무리는 아닙니다.
원래 “면죄부”란 것은 없었습니다. “대사부”가 와전(訛傳) 된 것이지요.
그러면 대사부가 어떤 것인지 알고 싶겠지요?
다들 알고 있다시피 가톨릭에서는 고해성사(告解聖事)라는
어려운 관문을 만들어 놓고 있습니다. 자신의 죄를 신부(神父)에게 고백하는 과정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하느님에게 직접고백하지 왜 같은 인간인 신부에게 해야 합니까? 우리는 하느님에게 직통으로 죄를 뉘우치고 고백한답니다.”하면서 천주교의 방식을 우습게 여깁니다.
그들이 무엇을 알겠습니까, 목사들이 그렇게 가르쳤겠지요.
나 역시 어릴 때 그런 생각을 한 적이 있으니 무리는 아닙니다.
신부에게 고백성사의 들을 권리를 준 것은 하느님을 대신하여 권위와 위엄으로 신자들 위에 군림하라고 한 것이 아닙니다.
그런 시스템을 만든 것은 아주 중요한 이유가 있지요.
신부들은 타인의 고백을 들음으로써 인간들의 추악한 내면을 알게 됩니다.
자신도 그런 나약한 인간의 범주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즉, 자신들도 그들처럼 나약하다는 것을 인정하여 만든 시스템이 고해성사인 것입니다. 그러한 과정을 통해서 신부들은 심신을 수양하게 됩니다.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타인의 죄를 수없이 들어야한다는 것이 즐거운 일이겠습니까, 괴로운 일이겠습니까?
정말 지혜로운 신부들이 후대 신부들을 위해서 만든 치밀한 심신 수양 프로그램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제도를 만들었다는 것은 바로 자신들의 나약함을 인정한 고백이기도 합니다. 신부들도 고백성사의 의무가 있으니까요. 고백을 해보면 알겠지만 그 과정이 그리 쉽지는 않습니다.
진심으로 뉘우치는 마음에 도달하지 않으면 그것이 불가능합니다.
하느님께 직접 고백 한다구요? 어이없는 말씀입니다.
솔직하게 얘기해봅시다. 직접 만날 수도 없고, 대화가 불가능한 조물주에게 고백을 한다고요? 간사하기 짝이 없는 우리 인간이 그런 일을 과연 진심으로 할 수 있을까요?
하느님은 마음에 든다고 듬뿍 상을 내리거나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어느 날 갑자기 벼락을 내리는 분이 아니라는 것을 누구나 다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고백성사라는 제도는 우리들보다 훨씬 더 현명한 사람들이
간사한 인간들을 위해서 만든 좋은 프로그램입니다.
그런데, 자신의 죄를 고백했다고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천주교에서는 죄와 벌을 구분해놓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남의 물건을 훔쳤다면, 분명히 죄를 지은 것입니다.
그 후에 고백을 하고 진심으로 자신의 잘못을 뉘우쳤다고 하면
끝나는 일일까요? 훔친 물건을 주인에게 돌려주고 사죄해야합니다.
그 주인이 용서해주면 죄는 사 해진 것이지요.
그러나 벌은 남아있습니다. 재판 받고 옥고를 치러야합니다.
천주교에서는 벌(罰)은 죽은 다음에 연옥(煉獄)에서 그 대가를 치러야한다고 가르칩니다. 살아서 그 대가를 치르게 하는 방법을 보속(補贖)이라고 합니다.
초기 교회에서 보속이 너무 힘들고 오랜 시일을 요하는 무거운 것이어서 교회로 돌아오지 않는 사람이 많았답니다.
그래서 교회의 권위로 그 벌을 사(赦)해주는 방법을 강구하게 된 것이지요. 이것이 대사(大赦)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대사(大赦)는 교황이나 주교만이 행사할 수 있는 고유권한입니다.
죄를 고백하고도 그 벌의 중압감에 시달리는 어리석은 신자들을 구제하기 위한 방법이지요. 현실로 비교하자면 <광복절특사>나 <대통령 취임특사> 같은 사면제도가 아닐까 싶네요.
어쨌거나 대사도 남용하면 안 되는 것이기에 교회에서는 엄격히 제한했다고 합니다. 문제는 중세 문예부흥시대에 예술이 찬란하게 꽃필 무렵
교회를 크고 화려하게 짓는 풍토가 생깁니다.
많은 재정이 필요하게 되지요. 재정의 확보를 위해서 대사부를
신도들에게 나누어주면서 교회건립기금을 받았답니다.
일부 몰지각한 사람들에 의해서 남발되면서 면죄부란 지탄을 받게 되었답니다. 요즈음 교회들이나 일부 신부들도 크고 화려한 교회를 짓는다고 신자들을 힘들게 만들기도 합니다. 물론, 그들은 대사부나 면죄부를 팔지는 않지만, 그보다 더한 감언이설이나 협박성 설교로 신자들을 농락하고 있는 것이 현실입니다. “성전 건립기금”의 중압감 때문에 교회를 등지는 사람들을
많이 보았습니다. 천주교나 개신교 모두가 많이 반성해야할 일입니다.
현재도 우후죽순(雨後竹筍)처럼 많은 교회들이 난립하고 있고,
교회하나를 짓자면 수억에서 수십억 원의 자금이 필요한데, 그 많은 돈은 어디서 났을까요? 성전 건립기금… 성전(聖殿)이랍니다.
왜 성전(聖殿)이냐고 물었더니 하느님을 모시는 곳이니 성전(聖殿)이라고 한답니다. 그래서 내가 하느님은 어디 계십니까, 하고 물었지요.
하느님은 이 세상 어디에도 계시고 모든 것을 다 알고 계신다고 대답하더군요. 이 세상 어느 곳에서나 존재하는 하느님을 어째서 당신들은
그 좁은 당신네 교회에 가두려고 하십니까, 하고 물었더니
아무 대답도 못하더군요. 하느님이 이 세상 만물을 창조하였고 이 세상 어디에도 존재한다면 이 세상 어느 한 곳이라도 성스럽지 않은 곳이 없을 텐데, 왜 당신들의 교회만이 성스러운 장소라고 말하느냐고 물었더니 주여! 이 사악한자를 용서 하소서, 하고 사라지더군요. 내 얘기가 너무 길었지요?”
“그러면 개신교의 창시자인 마르틴 루터는 어떻게 된 겁니까?”
“마르틴 루터의 직업이 무엇인지 압니까?”
“모릅니다.”
“마르틴 루터는 신부(神父)였습니다. 음악에 조예가 깊었고, 전례에 관심이 많았고, 상당히 잘 나가는 신부중의 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다가 나중에 노동자 편에 서서 정부를 상대로 노동운동에
앞장을 섰고, 후에는 정부 쪽으로 돌아서서 노동자를 탄압하는 편에 서게 됩니다. 그 내용을 상세히 알 수는 없지만, 어느 정도 힘이 생겼을 때 교회와 마찰이 시작되었고, 교회의 명령에 따르지 않고 반대를 했습니다.
지금도 그렇지만 신부는 교회의 명령에 따르게 되어있습니다.
이것을 순명(順命)이라고 합니다. 루터는 순명을 거부했고, 교회는 파문(破門)이라는 처벌을 가합니다. 신부 직을 박탈당한 거지요.
내 생각이지만 루터가 지금시대에서 그런 행위를 했다면 징계나 경고 정도로 끝나지 않았나 싶어요. 아무튼 신부 직을 박탈당한 루터는 26세 연하의 여자와 결혼했는데, 그렇게 되기까지의 이유가 여자 때문이었는지,
신부 옷을 벗었으니까 마음대로 결혼했는지 그 관계는 나도 모릅니다.
아는 것이라고는 신부노릇 하는 것밖에 모르던 루터는
또 다른 하나의 교회를 만들어 나름대로 교회를 운영하게 됩니다.
가톨릭을 떠난 사람이 가톨릭의 전례대로 운영 할 수는 없었겠지요.
그래서 성서만 가지고 교회를 엮어 나갈 수밖에 없는 것은 당연한 결론이 됩니다. 지금도 신부, 수녀에게는 사회적 대접이 괜찮습니다만
중세시대에는 교회의 힘이 국가를 좌우할 정도로 컸습니다.
신부들은 대단히 높은 지위나 다름이 없었습니다.
지금도 그렇지만 신부되기가 그리 쉬운 일이 아닙니다.
십 년 정도의 긴 기간동안 공부하고 기도하고 심신을 수양하고 여러 관문을 거쳐 공인을 받아야만 비로소 신부가 됩니다.
거기에 속하고 싶어도 자격이나 소양이 모자라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그런 사람들은 독자적으로 교회를 만들고 싶지만
힘도 없고, 교회의 위세에 눌려 지내고 있었습니다.
후세 사람들은 이들을 듣기 좋게 종교 개혁파라고 부릅니다.
마르틴 루터는 독일 사람이었기 때문에 자신만의 교회를
설립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자 때를 만난 듯이 유럽 여기저기서 교회를 만들어냈습니다.
이 교회들은 루터파 교회라고 자칭했답니다.
내가 보기에 진정한 의미의 종교 개혁이란 없었습니다.
그저 시대의 흐름과 인간들의 이기심, 욕심이 만들어낸 하나의 사회 현상일 뿐입니다. 개혁이란 어떤 집단의 내부에서 잘못된 것을 대폭 수정하여
그 집단이 새로운 형태로 탈바꿈하는 것인데, 큰 집단에서 쫓겨나거나 그 집단에 들어갈 자격이 없는 사람들이 작은집을 여기 저기 만든 것과 같은 양상입니다. 내가 개혁이 아니라고 말하는 것이 이해가 됩니까?
이렇게 말하는 것은 개신교를 폄하(貶下) 하려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역사적 사실을 바르게 아는 것이 개인의 정신 발전에 이롭기 때문입니다.
오해와 편견은 자신을 망칠 뿐 아니라 타인들에게도 좋지 않은 영향을 줄 가능성이 많습니다.“
“가톨릭에서는 성모상을 세워두고 절을 하는데 이것은 우상숭배행위가 아닙니까?”
“나도 성당에 다닐 때 성모상 앞에서 기도 한 적은 있습니다.
절은 해 보지 않았는데 교회에서도 절을 해라, 하지 마라,
지시하지 않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길 떠난 자식이 무사하기를 정화수 한 사발 떠놓고 빌고 또 빌던 우리 어머니, 할머니들의 정성을 누가 감히 우상숭배라고 말할 수 있습니까?
천지신명(天地神明)께 비나이다…로 시작하는 기도, 기원.
그것은 인간사를 주관하는 미지의 어떤 신(神)을 통하여 자신의 정성을 보내는 방법이었습니다. 다른 방법이 없었기 때문이지요. 내 경험으로 보면 강력한 염(念)은 이승과 저승을 초월합니다. 그래서 지성(至誠)이면 감천(感天)한다는 말도 있습니다.
그런 버릇과 전통이 성모상 앞에서도 가끔씩 이루어집니다.
할머니들이 잘 그래요. 좀 지나치다 싶으면 신부들이 자제하라고 부탁하는 정도입니다. 길을 가다가 웃어른을 만나면 머리 숙여 목례하는 것이 우리네 풍습입니다. 서양식 악수를 하면서도 머리를 숙이는 것은 우리나라 사람들 뿐 입니다. 머리를 숙이는 것이 존경심의 표시라고 할 수도 있겠지요.
하지만 나는 그저 오래된 버릇일 뿐이라고 단순하게 생각합니다.
불상(佛像) 앞에서 절하는 것을 보고 우상숭배라고 하는데,
그것도 잘못된 생각입니다. 불상(佛像)은 부처의 상징입니다.
돌 신(石神), 나무 신, 또는 해괴한 형상을 세워놓고 절대 신(神)으로 모신다면 우상숭배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부처는 실존했던 인물이며 훌륭한 사상과 가르침을 후대에 남겼습니다. 그런 분에게 존경심을 표현하고 그 가르침을 받겠다는 것이 우상숭배가 될 수 없지요. 제사, 차례 지내는 것도 우상숭배로 몰아가는 행위는 지탄받을 일입니다. 또, 요즈음에는 단군상의 목을 자르는 일부 목사와 추종자들이 있는데 그들 역시 마찬가지라고 봅니다.
구약성서가 수 천년동안 구전되어 내려오다가 문자가 생겨나자 지금은 해석조차 거의 불가능한 상형문자들로 기록되었고 구전(口傳) 된 것과 그 어려운 문서(文書)를 토대로 성경(聖經)이 만들어졌습니다.
단군(檀君)의 얘기도 마찬가지입니다.
수천 년 동안 구전되어 내려오던 것을 학자들이 기록으로 남겼으나 일본 사람들과 그들과 결탁한 사학자(史學者)들이 없애고, 왜곡하는 엄청난 업적(?)을 남겼습니다. 그런 사실을 아는 우리 대한민국의 국민 중에 단군 왕검을 부정하는 사람들이 있으니 참으로 부끄러운 일입니다.
비슷한 과정을 거친 유대민족의 역사인 성서는 철저하게 믿고, 단군 왕검은 부정한다? 한단고기라는 것도 검증이 안 되었다. 고로, 단군의 얘기는 사실이 아니다. 허구다. 웃기는 이야기 아닙니까?
그 사람들의 성씨(姓氏)가 뭔지는 몰라도 자신의 조상마저 없었다고 부정할 사람들이지요. 일부 일본 학자들이나 정치인들은 우리 국민을 얼마니 우습게 보겠습니까? 단군왕검을 부정하는 사람들일수록 성서에는 집착하니 참으로 불쌍한 생각이듭니다. 단군상의 목을 잘라내고 그 행위가 정당하다고 목청을 높이는 목사들과 그 추종자들은 매스컴의 인터뷰에도 당당하게 나섭니다.
기독교인이 아닌 사람들이 볼 때, 어떻게 생각할까요?
내가 들어본 결과로는 이구동성(異口同聲)으로 심한 욕을 합디다.
과격한 기독교인들 때문에 기독교에 대한 감정이 좋지 않은 사람들에게 예수 믿으시오! 믿지 않으면 지옥 갑니다, 하고 외치며 다니니 누가 기독교에 입문하려고 하겠습니까?
청량리에서 부랑자에게 밥을 나누어주는 목사를 생각해 보십시오. 안타까운 일이지요… 편견에 사로잡힌 사람은 스스로 점점 더 깊은 오해의 수렁으로 빠집니다. 우상숭배는 눈에 보이는 형상으로 판단해서는 안 됩니다.
십자가 앞에서 돈벌게 해달라고 기도하는 것,
우리아들 고시(考試)에 합격하게 해달라고 비는 것,
우리 가족 편안하고 화목하게 오래 오래 살게 해달라고 기도하는 것이 바로 우상숭배입니다. 그것은 바로 하느님을 열심히 기도하면 재물이나 복을 주는
저급(低級) 신으로 전락시키는 행위이기 때문입니다.
심지어 어떤 목사는 십일조를 더 많이 낼 수 있도록 도와달라는 기도를 하라고 가르칩니다. 심하게 말할까요? 가르치는 놈이나 그대로 따라하는 놈이나 도둑놈보다 더한 심보를 가진 자 들입니다.
생각해보세요. 십일조를 더 많이 낼 수 있게 해 달라?
월수입이 백만 원이라면 십 만원을 십일조로 내야합니다.
그러한 사람이 십일조를 오십 만원 낼 수 있도록 해 달라고 기도합니다.
그러자면 수입이 오백 만원이 되어야겠지요?
어떤 유명한 목사는 이런 날강도 같은 요구를 기도라고 가르칩니다.
자신들이 믿는 하느님에게 마치 바위나 나무에 대고 복을 비는 것과 같은 행위를 하라고 가르칩니다. 하느님을 공경한다면서 재물과 복(福)에게 머리를 조아리고 기도합니다. 제사 거부하고, 성모상, 불상, 단군상을 우상이라고 단정하는 목사들, 십자가 앞에서 돈 달라고 기도하라는 목사들,
머잖아 죽을 텐데 그때는 어찌하려고 그러는지 알 수 없습니다.
내 말이 틀렸다고 생각됩니까?”
“……………………………..”
“개신교 사람들을 너무 공박한다는 생각이 듭니까?
불교에도 그런 사람이 많고, 천주교에도 그런 신도가 많습니다.
단지, 개신교를 말하는 이유는 신도들의 지도자인 목사들 중에 그런 사람들이 많고, 어리석게 그 말을 따르는 신도들이 가여워 하는 말입니다. 달리 오해는 마십시오.”

[어리석은 자는 남에게 속고, 영리한자는 자신에게 속는다]

제2부. 유체이탈의 실행
제1장. 시작에 앞서…
1부에서의 온갖 잡소리를 읽으시느라고 수고 하셨습니다.
그만큼 유체이탈이란 것이 장난으로 하거나 호기심으로 접근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또, 종교와도 깊은 관계가 있습니다.
필자의 얘기에 공감하는 분도 있겠고, 헛소리로 생각할 분도 분명히 있을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진리를 탐구 하고자 하는 본인의 열망이
있어야 합니다.
.
저의 경험을 토대로 한 걸음씩, 한 가지씩 자신의 것으로 만들어 가기 바랍니다.
세상을 보는 눈이 달라질 것입니다.
사람들의 얄팍한 생각도 드러나 보일 것입니다.
정치 행태나 정치인들의 속임수도 보입니다.
당신의 직관력은 한층 더 발전될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당신은 점점 온화한 성격으로 변해 갑니다.
다른 사람의 아픔에 눈물을 흘리게 될 것입니다.
남들 보기에도 창피할 정도로 감정이 여려질 것입니다.
필자도 요즈음에는 TV에서 헤어진 형제나 부모를 수십 년 만에 만나
오열하는 사람들을 보면 흐르는 눈물을 주체 할 수 없을 정도입니다.
이상한 것은 그들의 아픔이 거짓말처럼 내 가슴에 전이(轉移)되는 현상입니다.
독자 여러분께서도 비슷한 경험을 할 수 있습니다.
부끄럽게 여기지 마십시오.
다른 사람의 아픔으로 흘리는 눈물은 자신의 영혼을 닦아주는
생명수와도 같은 것입니다.
전에는 무심코 지나던 길가의 걸인, 육교 계단의 장애인,
청량리 홍등가의 붉은 등불 아래 진열되어있는 자식 또래의
처녀들이 느끼는 아픔과 괴로움이 가슴을 저리게 만듭니다.
그것은 값싼 동정이 아닙니다.
비록 그들에게 도움을 줄 수 없더라도 당신의 그 느낌은
소중한 것입니다.

또한, 격정(激情)이나 욕망(慾望)의 늪에서 에서 헤어나게 될 것입니다.
참사랑이 어떤 것인지 스스로 깨닫고 자신도 모르게 그렇게 되어 가리라 믿습니다.
흔히들 타인 앞에서 자신을 낮추는 것이 겸손(謙遜)이라고 말들 하지만, 그것이 아니라는 것을 당신 스스로 깨닫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당신은 참으로 겸손 된 사람이 될 것입니다.

참된 겸손이란 무엇인가?
스스로를 자기 자신에게 낮추는 것입니다.
자신이 얼마나 보잘것없는 인품(人品)을 갖추었는지 스스로 인정하는 것이 바로 겸손입니다.
자신에게서 학식, 직위, 재산, 외모, 등을 모두 벗어 던지고 난 보잘것없는 그것이 바로 자신이란 것을 스스로에게 가르쳐주고, 그 사실을 스스로 인정할 때 참된 겸손의 길로 들어서게 됩니다.
겸손이란 상대적이 아닙니다.
참된 겸손이란 바로 자기 자신이 대상일 뿐입니다.
참된 겸손을 아는 사람은 가난하다고 무시하지 않으며, 무식하다고 얕보지 않으며, 힘없다고 윽박지르지 않습니다.

겉으로만 겸손한 사람은 많습니다.
특히 신앙을 가진 사람들이 많지요.
겉모양은 겸손하나 속은 자만으로 가득 차 있지요.
그런 사람들은 위기를 맞으면 여지없이 본색을 드러냅니다.
참된 겸손으로 가는 방법을 몰랐기 때문이고, 그것을 가르쳐주는 사람을 만나기 힘든 때문이겠지요.

참된 겸손을 아는 사람은 부드럽지만 강합니다.
유능제강(柔能制剛). 이점을 잊지 마십시오.
현실의 잣대로는 손해를 보는 경우가 종종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것은 결코 손해가 아닙니다.
양보와 너그러움이 절대 손해가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합니다.

제2장. 가위눌림 현상과 귀접(鬼接)
유체이탈의 실행에 앞서서 가위눌림과 귀접(鬼接)에 대해서
알아야할 필요가 있다.
유체이탈을 이해하는데 밀접한 관계가 있기 때문이다.
가위눌림이란 무엇인가?
잠들 무렵 귀물이 나타나거나 아주 무서운 분위기 때문에
몸이 말을 듣지 않고, 아주 혼이 난 경험을 대부분 갖고 있다.
필자도 예외는 아니어서 어렸을 때 가끔 혼난 경험이 있고,
입대를 몇 달 앞둔 71년경에는 이십 여 일을 시달리다가 척추가 일시 마비된 적도 있었다.
예전에는 가위눌림으로 목숨을 잃는 사람도 있었다고도 한다.

우리는 누구나 잠을 잔다.
잠으로 들어갈 때에는 단계가 있다.
알파니 베타니 하고 여러 단계로 분류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필자는 오로지 필자의 경험으로만 얘기하자.
따라서 단계적인 명칭은 없다.
평소에 사람들은 그 과정을 느끼지 못하고 숙면으로 들어간다.
예민한 사람들은 쉽사리 숙면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뒤척이다 잠이 들겠고, 보통 사람들은 컨디션이 평소와 다르거나 심적 고통이 있을 때 숙면으로 빠져들기 힘들다.
아주 둔한 사람들은 머리를 바닥에 대자마자 깊은 잠에 빠지기 쉽고, 꿈도 거의 기억하지 못한다.
어떤 면에 있어서는 가장 행복한 사람들이다.

오랫동안 이탈을 하면서 알게 되었지만,
숙면상태에서 우리의 육신과 혼은 일체(一體)로부터 벗어난다.
다시 말하면 숙면 상태에서 보자면 현실에서는 단순히 잠자는 것처럼 보인다.
이때 육신과 같이 잠이든 혼(魂)은 같은 장소, 같은 시간에 공존(共存)하고 있는 죽은 자의 세상-즉, 저승에서도 잠이든 상태로 나타난다.
잠이 깨면 육신과 혼은 순간적으로 합일하여 죽은 자의 세상에서는 볼 수 없는 존재가 된다.
이것은 오랫동안의 경험과 실험으로 얻은 결론이다.
숙면에 들어간 후 죽은 자의 세상에서 잠든 형태로 나타난 아내나 아이들을 깨워보려고 해보았지만, 모두 허사였다.
그것은 유체이탈이란 스스로 깨닫고 행하기 전에는 되지 않는다는 얘기다.
타인의 힘으로는 이탈이 불가능하다는 말이다.

잠이 들기 시작해서 숙면으로 들어가기 전까지의 짧은 시간을 조금 길게 느낄 때가 있다.
보통 때는 이 순간에 의식이 약해서 인지(認知)하지 못하지만 약간의 의식이 남아있을 때가 있다.
이 순간에 사람들은 자신도 모른 채 누운 채로 죽은 자의 세상을 보게 되는 것이다.
앞서도 설명을 했지만 죽은 자의 세상은 어둡고 침침하다.
사람이 극도의 공포를 느낄만한 분위기인 것이다.
이때, 시커먼 형상이 나타나 자신의 가슴에 걸터앉아 목을 졸라대기도 하고, 이상한 것들이 누워있는 자신의 주위를 빙빙 돌며 낄낄거리기도 하는, 아주 무서운 경험을 하게 된다.
이러한 현상을 흔히 가위눌림이라고 부른다.
얼마 전 TV 프로그램에서도 가위눌림 현상에 대해서 심층적으로 분석한다고 떠들어대며 취재를 했고, 방영하는 것을 보았는데, 한마디로 모두 헛소리를 하는 것이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본질을 모르는 사람에게 물어보니 헛소리를 할 수밖에 없지 않은가?
교수니 정신과 의사니 하는 사람들도 실체를 모르기 때문에 당연히 헛소리를 할 수밖에 없는 것이 현실이다.
가위눌림을 당할 때 몸이 말을 듣지 않는다.
그것은 공포심 때문에 영향을 받기도 하지만, 육신과 혼이 이미 반쯤 분리되어있는 상태이기 때문이다,
이때, 그 분위기에서 벗어나려면 혀나 입을 움직여보면 그로 인해 쉽게 몸이 움직여진다.
팔다리를 움직이거나 몸을 일으키려면 더 힘들고 공포심만 증가한다.
일어나면 불을 켜고 화장실에 가서 소변이라도 시원하게 보고 난 후 담배를 피울 줄 알면 한대 피우면서 시간을 보내거나
냉수 한 컵 마시고 찬바람 한번 쐬고 다시 잠자리에 들되 시체처럼 천장을 보고 눕지 말아야 한다.
다리사이에 커다란 쿠션이라도 끼우고 모로 누우면 시달리지 않게 될 것이다.
그렇게 해도 똑같은 분위기가 조성될 기미가 보이면 얼른 일어나 앉아서 책을 읽어 정신상태를 피로하게 만들어 바로 숙면으로 들어가게 하든지, 교회 다니는 사람들은 기도를 열심히 한 후에 잠을 청하면 된다.
이것도 저것도 잘 되지 않을 경우나 꿈자리가 아주 사나울 때에는 “안식향”을 태워 연기가 집안 전체에 퍼지도록 한 다음에 잠을 청하면 편안하게 잠을 잘 수 있을 것이다.
“안식향”은 어떤 것인가?
동의보감(東醫寶鑑)에 의하면 “귀(鬼)를 쫓고 신(神)을 부른다”라고 기술되어있다.
경동시장의 약재상에 가면 쉽게 구입할 수 있는데,
값도 비싸지 않다.
1990년경 한 근에 3,000원주고 산 적이 있었다.
악몽에 시달리거나 가위눌림 때문에 고생하는 주위 사람들에게 조금씩 나누어주었더니 모두 효과가 있었다고 했다.
과연 허 준 선생은 인간의 탈을 쓰고 하강한 신선(神仙)일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안식향은 귀접의 치료에도 쓰인다.
귀접(鬼接)이란 무엇인가?
글자그대로 귀신(鬼神)과의 교접(交接)을 뜻한다.
의외로 귀접의 경험이 많은 사람들에게 있었다.
사람들은 이것을 꿈으로 착각하기 쉽다.
이것은 꿈이 아니다.
말 그대로 실제 귀신과 성행위(性行爲)를 하는 것이다.
이 현상은 어떻게 일어나는 것일까?
가위눌림의 현상과 같은 시점에 귀신과 접하여 행해지는 것이다.
죽은 자의 세상을 약간 의식하고 있을 무렵 귀신이 달려들어 성행위(性行爲)를 하는 것이다.
물론 그 귀신은 살았을 때의 성적인 쾌락을 잊지 못하거나 그 방면에 한이 맺힌 망령들이다.
그렇다면 귀접(鬼接)과 꿈의 차이는 어디에 있을까?
귀접은 잠이 스르르 들 무렵 낮선 이성(異姓)이 다가와 누워있는 자신 위에 올라와 애무하거나 성행위를 한다.
귀접의 느낌은 현실의 그것과 같다.
입술이 닿는 감촉, 피부가 닿는 감촉과 느낌, 행위의 느낌. 질감까지 같다.
그리고 자신이 제 삼자로 보이지 않는다.
자신이 영화처럼 삼자로 보였다면 그것은 꿈이라고 판단해도 좋다.
꿈에서도 비슷한 경험을 할 수 있지만, 귀접과는 분명하게 다르다.
꿈속에서의 성행위는 그 기분이나 느낌은 유사하지만, 감촉은 실제 만큼
리얼하지는 않다.
각자 지난 자신의 경험을 돌이켜 상기해보면 어느 정도 까지는 분별이 가능할 것이다.
지금쯤 “그게 꿈인 줄 알았는데 귀신과 교접한 것이었구나…”하고
몸서리 쳐질 사람도 있을 것이다.

서양의 설문조사에 의하면 사별한 부부의 50퍼센트 정도가 꿈에 만나서 성행위를 한다고 한다.
살았을 때 금실이 좋았던 부부들이 이런 경험을 많이 하게 된다.
이 모두가 귀접이다.
어떤 여성은 남편이 살아있는데, 매일 밤 예수님을 만나서 사랑을 나눈단다.
어떤 여성은 남편이 죽고 난 후에도 생기발랄하다.
왜냐고 물었더니 죽은 남편이 자기 곁을 떠나지 않고 계속 지켜주고 있단다.
어떻게 그것을 아느냐고 물었더니 매일 밤 사랑을 나누고 집안일까지 상의한단다.
그게 과연 옳은 일일까?
그 귀신이 과연 죽은 남편일까?
사람이 죽으면 살았을 때의 관계를 모두 접고 명부에 들어야 정상인데, 그것을 거부하고 있는 현상이 좋은 것일까?
그들이 대부분 독실한 교인인데 말이다.

몇 년 전 어떤 고등학생은 매일 밤 어떤 여자가 찾아와 성행위를 한다고 고백하였다.
그녀와 대화도하고. 심지어 그 여자가 결혼하자는 얘기도 한다고 하였다.
귀접의 중증(重症)이다.
동의보감의 처방대로 약을 사용하거나, 중요한 것은 실체를 알았으니 그것을 끊어버리려는 의지가 있어야만 한다.
그냥 그대로 즐기면 되지 않느냐고 반문할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귀신과의 교접을 즐기는 사람이 현실에 제대로 적응할 수 있을까?

귀접을 무방비 상태로 즐기면 건강이 아주 나빠져 결국은 병이 들어 목숨을 잃거나, 빙의 상태로 살아가다 정신병자로 발전 할 가능성이 많다.

그것이 괜찮은 일이라면 왜 우리의 슈퍼스타 허 준 선생께서는 처방까지 하여 금하라고 하였을까?
판단은 독자께서 할 일이다.

옆집에 약간 음탕한 성품의 처녀가 살고 있었다.
시집가고 싶어서 안달이 났지만 데려가는 사람이 없었다.
필자가 보기에는 때가되어 음기가 발동한 것이다.
즉, 그녀의 몸이 남자를 원하고 있는 것이다.
어느 날 이탈 후 그녀의 방을 방문했다가 깜짝 놀라고 말았다.
그녀의 작은 방은 수십 명의 벌거벗은 사내로 가득 차 있었다.
“이보시오! 당신들은 모두 죽은 사람들이 아니오? 죽었으면 제갈 길을 가야지 어찌해서 남의 처녀 방에 떼거리로 모여 있소?”
내가 그렇게 말하자 험악한 얼굴로 벌떼같이 일어나 내 주위로 몰려들었다.
“당신이 뭔데 남의 일에 참견하는 거야?”
아주 험악한 분위기가 조성되었다.

그런 부류들은 설득을 해도 되지 않고, 잘못하면 나에게 피해가 올 것 같았다.
“알았네, 알았어. 당신들이 하는 일에는 참견하지는 않겠다. 하지만, 단 한사람이라도 우리 집으로 넘어와서 기웃거리면 그때는 용서하지 않을 것이네.”
그렇게 말하고 돌아서서 나와 버렸다.

그녀는 귀접의 알맞은 대상이다.
그녀 스스로 남성을 원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녀는 꿈(?)속에서 많은 사람들과 만나서 관계를 가졌을 것이다.
세월은 흘러 그 처녀도 시집을 가고 그 후의 소식은 모르지만
결혼해서 남편이 있으니 귀신들도 떨어져 나갔을 것이다.
하지만 남편이 그녀의 음욕을 채워줄 수 없는 상황이 발생한다면 또다시 음귀(陰鬼)들이 달라붙을 것이고, 그녀가 그것을 이겨내지 못한다면 처녀 때와는 달리 문란한 생활을 하게 될 것이다.

필자가 임의로 유체이탈이 가능해진 87년 경, 명상을 하거나 기(氣)운용을 하고 있자면 아내가 시집올 때 가져온 화장대가 뚝뚝 거리는 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기온의 변화 때문에 나는 소리거니 하고 무시했다.
그런데 갈수록 심해졌고, 어떤 때에는 도끼로 내려치는 듯한 큰 소리를 내서 명상을 깨어버리기 일쑤였다.
수평이 맞지 않아서 그런가보다 하고 수평도 점검을 해 보았으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화장대를 다른 자리로 옮겼고, 그 자리에는 TV 장식대를 놓았다.
아니나 다를까 화장대의 소리는 사라졌고, 그 자리에 온 장식대가 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느낌이 아주 좋지 않았다.
그래서 이탈을 하여 그 자리에서 소리를 질러댔다.
“아무래도 여기 어떤 놈이 숨어있다. 모습을 드러내라.
만일 계속 숨어서 나를 방해한다면 죽어서도 용서하지 않겠다!”
연 사흘 동안 소리를 질러댔더니 엄포가 통했는지 장식장 뒤에서 소복을 입은 여자가 슬그머니 나타났다.
“너는 누군데 남의 집에 숨어서 일을 방해하느냐?” 사납게 호통을 쳐 물었다.
“저는 명(命)에 의해서 이곳을 지켜야한답니다.”
그녀는 가련한 목소리로 대답하였다.
“명이라니, 누구의 명령이냐?”
“그것은 말씀드릴 수가 없어요.”
“나는 너 같은 것과 한집에 살수 없다. 다른 곳으로 썩 가거라!”
“저도 괴로워서 한집에 살 수 없습니다. 하지만 명(命)때문에 이곳을 떠날 수가 없답니다.”

그런 종류들이 터 귀신이다.
이른바 지박령이다.
땅이나 집. 큰 나무. 바위 등을 근거지로 삼는 귀신들이다.

곰곰이 생각해보니 난감한 일이었다.
하지만 그런 귀신과 한집에 기거하자니 찜찜하고.

그러던 어느 날 편안하게 잠자려고 드러누웠는데 웬 여자가 슬그머니 나타나 내 위에 살포시 엎드렸다.
그러더니 여기 저기 애무하기 시작했다.
꿈이겠거니 생각하다가 아차! 하고 정신이 퍼뜩 들었다.
“이봐, 너는 누구냐?” 응답이 없었다.
“얼굴을 가까이 대라, 누군지 봐야겠다.”
그러자 그녀는 하던 일을 멈추고 얼굴을 갖다댔다.
“너 우리 집에 숨어있는 지박령 이로구나. 누가 이런 짓을 하라고 했나? 이런다고 내가 순순히 너의 술수에 넘어갈 것 같은가?”
“도저히 한집에서는 살수가 없어요. 제가 딴 곳으로 갈 수 없기 때문에 너무 괴롭답니다. 그러니까 제발 다른 곳으로 이사를 할 수 없나요?”
“네가 이런다고 해서 순순히 말을 들을 내가 아니다. 나는 이사를 할 수 없으니 네가 떠나라.”
“제발 저 살려주시는 셈치고 제발 이사를 하세요.”
그녀는 온갖 슬프고 애절한 어투로 애원했다.

그렇게 그녀와 승강이 벌이기를 한달 여, 필자도 지쳐버리고 말았다.
그래서 다른 곳으로 이사하려고 여기 저기 집을 알아보았지만
도무지 마땅한 데를 찾을 수가 없었다.
결국 내가 도망 갈 수 없다는 결론을 내리고 그녀에게 최후통첩을 보냈고, 말을 듣지 않는 그녀와 싸움을 시작했다.
그녀와의 싸움 한 달 만에 결말이 났고, 나는 편안한 마음으로 살 수 있었다.

교인들은 기도나 경문(經文)을 욀 때,
명상을 하거나 단전호흡을 할 때 주위의 기물에서 이상한 소리가나거나 방해하는 일이 생기면 지박령이 있는지를 의심할 필요가 있다.
필자의 경우를 보고 귀신을 몰아내는 무당(巫堂)이나 도사(道士)로 오해하지 말기 바란다.
나는 도사도 아니고 무당은 더더욱 아니다.
내 일을 겨우 혼자 힘으로 해결하는 정도의 수준인 것이다.
남의 일에 간섭 한 적도 없고, 그런 자격도, 능력도 없는 사람이다.
내가 직접 해결하였듯이 필자의 경험을 참고하여 직접 해결하는 것을 권하고 있는 것이다.
누군가 신통력이 있는 것처럼 떠들고 돈을 요구하는 자가 있다면 모두가 사이비나 사기꾼이라고 판단해도 틀림이 없을 것이다.

필자는 수많은 망령들을 만나보았고, 나름대로 설득해서
명부(冥府)에 들도록 해주었고, 주저하는 이들은 직접 데려다주었다.
상 받을 일도 아니고, 유명해질 일도 아니고, 돈벌이도 안 되는 일이지만 하다보니 그렇게 되고 만 것이다.

경기도 화성에서 연쇄 살인사건이 있었다.
어린아이들까지 강간하고 살인하는 악마 같은 인간의 짓이다.

정말 안타까운 일이었고, 그래서 그 중의 한 아이의 이름을 부르면서 만나보기를 애타게 노력해 보았지만 허사였다.
아이를 만나서 그 잔악무도한 인간의 정체를 알고 싶었다.
그래야 연쇄 살인이 멈출 테니까.
하지만, 나와 필연적인 관계가 없는 사람을 지정해서 만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았을 뿐이다.
그렇기 때문에 독자 여러분이 사이비들에게 속지 말아달라고 부탁하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 다같이 생각해보자.
죽어서 갈 길을 찾지 못하고 떠도는 망령들은 이 세상에 살고 있는 사람들 만큼이나 많다.
그 수많은 망령들 중에서 특정인을 불러온다는 것은 불가능해 보였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특정인을 불러낸다고 자랑한다.
솔직히 말하자면, 나는 그런 주장을 의심하고 있다.
만약 그런 일이 그렇게 손쉬운 일이라면, 화성 연쇄 살인 사건의 살인마를 잡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을 것이다.
유체이탈로 만날 수 있는 사람들은 전혀 모르는 불특정 다수의 망령들이다.
특정인은 만날 수 없는가?
거의 불가능하다고 본다.

나의 경험에 의하면 숙명(宿命)의 관계만 가능하다고 본다.
숙명(宿命)의 관계란 인간이 태어나기도 전에 이미 정해진 관계를 말한다. 부모(父母), 처자(妻子), 형제(兄弟)….

남의 힘을 빌려 돈으로 해결하려 하다보면 결국 이용당하고 돈까지 빼앗기는 꼴이 된다.
쉬운 일은 아니지만 직접 해결하는 것이 가장 확실한 방법이다.

(귀 엽)
동의보감에 의하면, 귀엽이란 잠을 잘 때 혼백이 밖에 나가서 노니는 현상을 말한다.
귀엽 현상은 어떻게 해서 발생하는 것일까?
우리가 잠을 자면 육신 뿐 아니라 혼백도 같이 잠들어야한다.
그런데 어떤 연유인지 모르지만, 혼백이 잠들지 못하는 경우가 있다.
잠에 들어가는 시간의 편차가 발생하여 누운 채로 그 상태를 인식하게 되는 상황이 흔히 말하는 가위눌림이다.
움직이지 못하고 쩔쩔 매는 것은 당사자가 그 상황을 알지 못하는 데에서 비롯한다.
누운 채로 사물을 바라보고 있는 존재는 육신이 아닌 자신의 혼백이다.
육신은 이미 잠들어 있는데, 같이 잠들어야 할 혼백은 육신과 분리된 채
죽은 세계를 바라보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죽은 세계에 존재하는 귀신들을 보게 되고 공포감에 질리게 된다.
이정도의 상황은 누구나 한두 번 겪으니 별 문제될 것은 없다고 본다.

그러나 그 증세가 심하여 혼백이 그 자리에 있지 않고 일어나 이리저리 돌아다니는 사람들이 있다.
이런 증세를 “귀엽”이라고 한다.
귀엽을 오래 방치하면 목숨을 잃게 된다고 허준 선생은 경고한다.

가위 눌리다가 죽는 수도 있다. 라고 표현 한 것은 바로 이 현상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이제부터 유체이탈의 실행

제3장. 유체이탈의 실행 방법.
우선, 가위눌림 과정에서의 희미한 의식을 현재의 것처럼 또렷하게 갖도록 노력해야한다.
다시 말하자면 잠이 들되 몸만 재우고 혼-정신을 바짝 차려
정신은 잠들지 않게 해야 한다.
말이 쉽지 어떻게 그것이 가능할까 의심하는 분이 많을 것이다.
준비만 제대로 한다면 어렵지 않게 실행할 수 있는 일이다.
유체이탈이 가능하자면 우선 상단전(上丹田)이 발달해야 한다.
상단전은 눈과 눈 사이- 즉, 미간(眉間)의 안쪽에 위치하고 있다.
단전호흡을 해본 사람들은 어렵지 않게 이 설명을 이해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자기 수련은 특별하게 상당전만을 단련시키는 것은 아니다.
단전호흡의 조식 자세, 그 자체가 상단전을 자연스럽게 발달시킨다.
특히, 양쪽 눈의 시선을 코끝으로 모으는 자세는 처음엔 조금 힘들기도 하고 자꾸 풀어지기도 하는데, 자꾸 하다보면 힘들이지 않고 자연스럽게 그런 자세가 나오게 된다.

실행준비.
(1) 환경.
조용한 방이 좋다. 전화 벨 소리나 야채 장사의 확성기 소리가 들리지 않는 것이 좋다. 요즈음은 대부분 휴대폰을 가지고 있는데, 반드시 전원을 꺼두도록 한다. 진동으로 두어도 명상 시에는 아주 크게 들려 방해가 된다.
이런 환경을 조성하기 어려우면 모두가 잠든 밤에 실행할 수밖에 없다.

(2) 호흡과 명상.
호흡과 명상은 따로 실행하는 것이 아니라 동시에 이루어진다.
호흡에 열중하여 잡생각을 하지 않는 상태 자체가 바로 명상이다.
말은 이렇게 쉽지만, 실제로 행하다보면, 생각이 꼬리를 물고 방해를 한다.
억지로 생각을 지우려고 하면 더 심해 질수도 있으니 생각이 일면 그대로
두고, 눈앞에 헛된 영상이 보이면 그냥 바라보자.
그렇게 하다보면 점차로 정리된다.

(자세)
허리가 꼿꼿해 지도록 엉덩이 밑에 방석을 두 장정도 받쳐주고, 몸과 벽 사이의 거리를 1미터이상 둔다.
기(氣)의 작용으로 몸이 흔들릴 경우 머리가 닿지 않도록 하기 위함이다.
결가부좌(結跏趺坐)든, 반가부좌(半跏趺坐)든 상관이 없고, 책상다리를 해도 된다. 눈을 감은 채 시선은 코끝으로 향한다.
처음에는 눈 근육이 아프고 시선이 자꾸 풀리지만 반복하는 동안 익숙해진다. 종래에는 이 자세만으로도 충분히 기의 흐름을 느낄 수 있게 된다. 나는 운전 중에 의식을 두정(백회)에 두기도 했다.
그러면 두정으로 들어오는 기의 느낌이 상당히 강할 때도 있었다.
이럴 때에는 의식하지 않고, 시선을 모으지 않아도 상단전에 기가 뭉쳐지는 느낌이 강렬해지기도 한다.

(호흡)
위의 자세로 호흡을 하는데 편하게 4초간씩 8초의 호흡을 하면 된다. 초침의 소리에 맞추어 하나, 둘, 셋, 넷, 세어가면서 호흡을 해도 되고, 기독교도는 “찬미예수” “성령 충만” 어느 것이든 상관없이 한자씩 암송하되 한자에 1초정도씩 할당한다.
필자는 주로 “정신일도 하사불성”을 암송하였는데,
4초간의 호흡이 너무 답답해서 8초간 16초 호흡을 하기 위해서였다.
길게 한다고 좋거나, 짧다고 기가 덜 모이는 것은 아니니 각자 편한 상태의 호흡을 하는 것이 좋고, 호흡은 크게 하는 것이 아니라 아주 미약하고 가늘게 해야 한다.
그렇게 호흡의 길이를 맞추어 가면서 하지만, 세월이 가고 경력이 쌓여가면서 종래에는 호흡한다는 것 자체를 잊어버리기도 한다.
이런 것은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자연스럽게 호흡(呼吸)을 하되, 호(呼)와 흡(吸)의 길이를 갖게 하고,
호흡에 몰두하여 잡생각을 떨어버리되 억지로 만들지는 말자.
중요한 것은 이러한 행위를 하는 당사자의 목적이다.

이렇게 호흡을 하다보면 빠른 이는 10분 이내,
늦은 사람도 30분 이내에 기(氣)의 움직임이 느껴질 것이다.
약하게 느껴지는 사람은 상단전이 묵직한 정도일 것이며,
두정으로 들어온 기(氣)의 줄기가 미간 사이를 오락가락하며 천천히 몸을 시계추처럼 흔들리게 할 것이다.
진동이 사람은 기의 흐름이 몸을 오뚝이처럼 마구 흔들어대거나
엉덩이까지 들썩거리게 만들 것이다.
하지만, 심한 요동이 기의 축적을 강하게 하는 것은 아니니
마음 쓰지 말고 잠잠해질 때까지 기(氣)의 흐름에 몸을 맡겨버리면 된다.
이때, 놀라거나 기뻐하지 말고, 초능력이 몸 안으로 들어오는 듯한 착각을 해서는 안 된다.
누구에게나 일어날 수 있는 일이니 담담하게 기의 흐름에 몸을 맡기고
호흡에만 열중하면 된다.

기의 작용으로 어느 정도 몸이 흔들리다가 조금씩 약해지고 마음이 평온해진다.
이즈음 되면 눈앞에 청색이나 녹색의 빛이 보이기도 한다.
이런 현상이 없더라도 상단전이 무겁게 느껴지고 마음이 평온해지면 준비는 된 것이다.

(3) 이탈.
이제는 편하게 눕는다. 이때 코를 골지 않게 목뒤에 조금 얇은 베개를 받치는 것이 좋다.
그리고 의식을 상단전에 집중시키고 마음속으로 자신에게 말한다.
“자, 이제부터 나는 잠을 잔다. 그런데, 육신만 재우고 나의
정신은 잠을 자지 않는다.”
이렇게 되풀이 하다보면 미간이 서늘해질 것이다.
미간에서 바람이 이는 듯한 느낌이 있을 수도 있다.
이럴 때에는 “기가 들어온다. 상단전으로 기가 들어와 가득 채워진다.” 하는 생각을 해보자.
하늘로부터 기의 줄기가 직접 두 눈 사이로 들어오는 것을 느낄 수 있다.
그런 느낌이 없어도 상관은 없다.

그러고 있노라면 정신은 초롱초롱 맑아지는데, 거짓말처럼 잠이 서서히
다가오는 것이 보인다. 바로 이때가 가장 중요한 시점이다.
잠이 다가오면서 -윙- 하는 소리가 들리면서 눈앞의 광경이 회전을 하기도 한다.
이 순간이 육신은 현실에서 잠이 들고, 자신의 혼은 육신과 분리되어
죽은 자의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는 순간이다.
다시 말하자면, 육신과 혼이 분리되는 순간이다.
분리는 되었지만, 누워있는 혼을 자신의 의지로 일으켜 세우지 않으면
누운 채로 죽은 자의 세상을 보게 되고, 그 세계에 존재하는 망령들을 보게 되는 것이다. 이 상태를 우리는 가위 눌리는 상태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바로 이 시점에 “ 일어난다, 일어난다.”를 되풀이해서 강하게 자신에게 명령하자.
미처 일어나기도 전에 무서운 형상이 보이거나 분위기 자체가 무서울 수도 있다. 또 주변에서 무언가 왔다 갔다 하거나 낄낄거리는 웃음소리가 들리거나 무서운 형상을 목격하기도 하는데, 그것은 자신의 내부에 잠재해있는 공포심이 만들어낸 허상이거나 환청이다.
누워있는 자신의 혼을 일으켜 세우면 그것들은 대부분 사라진다.
미처 혼을 일으키지도 못 했는데, 방문 앞에 산발한 여인이
칼을 물고 서있다거나, 무섭게 생긴 할머니가 노려보고 있다거나 어떤 무서운 것이 기다리고 있는 느낌이 들 수 있다.
사람에 따라 조금씩 다를 것이다.
이런 무서운 형상이나 분위기를 보게 되는 것은 우리 인간들
내부에 공포심이 본질적으로 잔재(殘在)하고 있기 때문이거나,
영화나 드라마를 통해서 입력된 두려운 정보가 만들어낸 허상(虛像)이다.
미처 일어나기 전에 이런 것들이 보이면,
“누가 이런 장난을 하는가, 내가 일어나서 보아야겠다. 잠시 기다려라.”
하고 으름장을 놓아도 괜찮다.
하지만 막상 일어서면 모두 사라지고 만다.

지금은 이렇게 쉽게 설명을 할 수 있지만, 사전 지식이 전혀 없는 상태에서
의 실행은 참으로 두려웠다.
이러다 죽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필자에게는 아들이 두 놈 있는데, 그놈들을 위해서 내 목숨을 던진다는 각오로 덤벼든 것이다.
이상한 존재들이 주위에 있다는 것을 느끼는데, 내가 무섭다고 피하면 아이들에게 피해가 갈 것 같은 느낌이 들어 그런 무식한 용기를 낼 수 있었다.
여러분은 나와 같은 두려움을 가지지 않아도 된다.
나의 경험을 믿어도 좋다. 내가 공연히 여러분들을 죽음으로 인도하겠는가.

(이탈 후)
사람에 따라, 자신의 상태에 따라서 혼을 일으켜 세웠는데 중심을 잡지 못하거나, 둥실 떠 천장에 닿는 느낌이 드는 경우도 발생할 수 있다.
생각만으로 바로 잡을 수 있으니 조금만 노력하면 된다.
그쪽에서는 입을 벌리지 않아도 대화가 가능하다.
입으로 말을 하지 않는데도 대화가 가능하다는 것이 참으로 신기했다.
결코 잊지 말아야 할 것은 그곳은 죽은 자의 세상이라는 점이다.
절대, 현실로 착각하지말기 바란다.
자, 우선 전등을 켜 보자.
스위치를 눌러도 딸깍거리는 느낌이나 소리는 들리지만 불은 켜지지 않는다.
TV 스위치도 작동하지만 화면은 깜깜하다.
같은 공간, 같은 시간에 존재하지만, 그곳은 이승- 즉, 산(生) 사람들의 세상이 아닌 것이다.
당신은 죽은 자의 세상에 들어간 것이다.
육신을 재워두고 혼만 빠져 나왔으니 당연히 죽은 자의 상태와 같은 조건인 것이다.
그래서 만나는 사람들은 모두 죽은 사람이다.
명부(冥府)에 들기를 거부하거나 갈 길을 모르는 부류이거나, 급사(急死)한지 오래되지 않았기 때문에 죽었다는 사실조차 인식하지 못한 사람이거나, 그저 생각 없이 구천을 헤매는 부류들이다.
옆에 아내나 남편, 자식 형제들이 숙면에 빠져있다면 분명히 자는 모습으로 보일 것이다.
자신은 보이지 않는다.
왜 그런가?
자신은 일어나서 그들을 보고 있는 상태이기 때문이다.
만일 내 자리에 누군가 누워있다면 호통을 쳐서 깨워 보라.
벌떡 일어나서 도망 갈 것이다.
혹시 죽은 자신의 부모나 형제를 만나면 좋은 말로 타일러 명부(冥府)에 들도록 도와주어야 한다.

이 단계까지 왔으면 임의로 유체 이탈이 가능해진 것이다.
필자가 헛소리를 하지 않았다는 것을 당신 스스로 증명하여 지금부터 이루어질 그 공(功)과 깨달음은 모두 당신의 것이다.
불교도는 부처님을, 기독교인은 예수님을 만날 수도 있다.
물론 그리 쉬운 일은 아니지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세속적인 문제로 만날 수 없으며 해답도 주지 않는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한다.
현실에서처럼 그쪽 세계에서도 가짜예수, 가짜 하느님도 만날 수 있다.
예수는 신이 인간의 모습으로 내려와서 바른 길을 가르쳐 주었고, 당신의 약속대로 지금도 인간의 모습으로 명부를 관장하고 우리를 기다리고 있지만, 하느님이라고 부르는 존재는 교회에서 말하는 형상과는 다르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필자는 하느님-그분(이런 호칭이 맞는지는 모르지만 적절한 것이 없어서 ..)에 대해서는 언급을 하지 않겠다.
그 이유는 필자가 설명한 지금의 단계에 이르면 본인이 직접 느끼고 알게 된다.
당신이 올바른 마음을 갖고 있다면 쉽게 분별이 가능하다.
그리고 떠돌이 귀신들과 타협할 생각을 하지 말아야 한다.
그것은 불가능하다. 그들은 그런 능력이 없기 때문이다.
좋아하는 여배우의 집에 몰래 잠입하여 훔쳐볼 수 없다.
거기서 발견하는 사람들은 모두 저질의 망령들이다.
다시 한번 부탁하지만, 유체이탈의 능력은 세속적인 목적을 위해서 사용 할 수 없으니 그런 목적이라면 상당히 실망을 하게 될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자신의 깨달음과 종교의 참 의미를 알고자하는 올바른 생각과 목적으로 행(行)하여야한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사이비 종교인이나 사기꾼으로 전락하여 자신의 인생을 망치고 말게 될 수 있다.

꿈 이야기
누구나 꿈을 꾼다.
정신세계가 넓고 깊어지면 상단전도 강화되고 따라서 꿈도 많아지며 확실해진다.
꿈을 통해서 자신의 일이 어려워질 것이라든지 순조로워 질 조짐을 알 수 있게 된다.
직관력이 발달해진 때문일까?
단전호흡과 명상을 하면(유체이탈의 준비과정도 단전호흡과 명상이 수반된다.) 꿈이 이전과는 달라진다.
남들은 전부 걸어 다니면서 쩔쩔매고 있을 때 마음만 먹으면
날아다닐 수 있고, 절벽에서 뛰어내려도 두 팔만 벌리면 새처럼 자유롭게 날 수 있게 된다.
많은 사람들을 인도하게 되기도 하고, 다른 사람들에게는 없는 초인적인 능력을 쉽게 발휘하게 된다.
악몽에 시달리는 횟수가 현격히 줄어들 것이요 설사 악몽에 시달리더라도 전처럼 못 견디게 괴로운 것이 아니라서 쉽게 벗어날 수 있게 된다.
꿈속에서 그럴 수 있는 것이 무슨 소용 있느냐고 말할 사람도 있을 것이다.
과연 그럴까?
과연 그것이 소용없는 짓일까?
경험해보지 않은 사람은 알 수 없는 일이다.
또, 꿈이 아닌 꿈을 꾸게 된다.
이것은 무슨 말인가?
깨어나면 꿈이려니 여겨지지만 꿈이 아닌 것이 있다.

정신 상태를 맑게 가지면 자신도 모르는 힘이 작용해서 다양한 세계를 경험하게 한다.
신(神)이 도와준다고 믿어도 되고, 조상신(祖上神)이 도와준다고 믿어도 되고, 수호신(守護神)이 정신세계의 발전을 위해서 다양한 경험을 시켜준다고 보아도 무방하다.

태양계가 아닌 곳 – 그런 곳에 가서 여러 개의 달이 동시에 보이는 곳을 구경하게 되기도 하고, 이른바 지옥 같은 차원이 낮은 곳에 끌려가 몹시 무서운 체험도 하게 된다.
이외에도 지금까지 없었던 여러 가지 낯선 경험을 하게 될 것이다.
너무 심각하게 받아들일 필요는 없지만, 애써 무시하지도 말아야한다.

안식향을 태우는 방법
꿈자리가 몹시 사납거나 잠들 무렵 귀물이 자주 보일 때 안식향을 태우면 효과가 있다.
동의보감에 의하면 안식향을 태우면 “귀신을 쫓고 신을 부른다.”라고 되어있다.
이때, 안식향에 직접 불을 붙이면 안 된다.
그렇게 하면 기름처럼 시커먼 연기를 내면서 활활 타버린다.
작은 쇠로 만든 용기에 조금 담아서 그 아래에 열을 가하면 송진과 비슷한 냄새와 푸른 연기가 발생한다.
이때, 열을 아주 미약하게 하여 서서히 연기다 골고루 온 집안에 퍼지도록
하는 것이 좋다.
그렇게 연기가 적정량 흩어진 다음에 불을 끈다.
안식향은 보통 향(제사 지낼 때 사용하는) 보다 향이 강하지만
집안에 배어들어 지속적으로 냄새는 나지 않는다.
괴로움을 당하는 사람들에게 조금씩 나누어주고 태우게 했더니 이 방법은 상당히 효과가 있었다.
역시 허 준 선생은 보통 인간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성서(聖書)의 역사
본문 중에 성서에 대한 언급은 가톨릭 대사전을 참고하였으며
교회에서 성서의 역사에 대해서 자세한 언급을 피하는 것과 같은 맥락으로 필자도 더 이상의 파헤치기를 자제하기로 했다.
자세히 알고 싶은 분은 가톨릭 대사전을 참고하기 바란다.
구약성서를 좀더 깊이 이해하고 싶은 분은 성 바오로 출판사 발행의 “H.링그렌” 저 “이스라엘의 종교사”를 참고하면 좋으리라고 생각된다.

유체이탈 후 실험
유체이탈이 가능해지면 현재의 의식이 남아있다.
그러나 이성의 작용은 상당히 약하다.
본능에 따라 마음대로 움직이려는 자신을 자제하고 다스려야만 한다.
그러자면 평소에 이탈후의 마음가짐과 행동에 대해서 진지하게 생각하고 스스로 다짐을 해주어야한다.
자신을 교육시키는 과정이 필요한 것이다.
그렇게 다지고 가르쳐야 현실에서와 같은 이성으로 판단하고
행동할 수 있게 된다.

이탈하면 죽은 자의 세상이라 했고, 다른 사람들(죽은 자)처럼
당신도 혼령의 상태다.
육신이란 옷을 벗었으니 한번 시험해보자.
방문을 열지 말고 그냥 통과해보자.
유리문이라든가 얇은 문은 쉽게 통과가 될 것이다.
두꺼운 문이나 벽을 통과하기는 조금 어려울 것이나 점차 가능해 질 수도 있다.
죽은 자의 세상에 머물고 있는 저급 혼령들은 얇은 문도 통과하지 못한다.
그들은 살았을 때의 고정관념을 쉽게 깨트리지 못하는 것 같았다.
그리고 그들은 당신이 산 사람이라는 것을 잘 안다.
그들과 어떻게 다른지 내 자신의 모습을 볼 수 없으니 알 수 없었지만, 저급의 혼령들은 산사람이라는 것을 알고는 적대감을 드러내기도 한다.
왜 그런지는 모르지만…
특히 명부를 찾아가면 누구든지 놀란다.
“어? 당신은 산사람인데 어떻게 여기에 올 수 있소?”
가는 곳마다 사람들이 놀라움을 표시했다.
죽은 자의 길을 제대로 간 사람들은 필자에 적대감을 나타내지 않았다.

좀더 높은 곳으로 가보면 (명칭은 모름) 명부에서의 마지막 단계에 해당하는 장소를 가볼 수도 있다.
그곳은 인간을 환생시키는 작업을 하는 사람(?)들이 있다.
우리 인간들과 같은 모습이라 스스럼없이 가까이 다가갔다가
깜짝 놀라고 말았다.
그네들은 전부 여자 같았는데, 특이한 것은 그들의 눈이 밝은 초록빛을 띠고 있었다. 그리고 눈동자가 없었다.
마치 초록색 유리구슬 속에 작은 전구를 켜놓은 것처럼 환하게 밝았다.
처음에는 생소해서 약간 두려운 마음이 있었지만,
그녀들은 한결같이 상냥하고 묻는 말에도 친절하게 답하였다.
교회에서 말하는 천사일까 하고 생각해 본 적도 있지만
그런 것 같지는 않고, 어떤 존재인지 확실히 알 수는 없었다.

자기 수련의 효과
여기서 수련이란 호흡과 명상을 동시에 하는 행위를 말한다.
수련을 하다보면 상단전이 상당히 발달하는 것을 느끼게 된다.
상단전의 발달은 여러 가지 효과가 있다.

첫째로 분별력이 상당히 증가한다.
꿈과 이탈, 환상, 전(前)에는 분별 할 수 없었던 것들이 점차로 분별이 가능해진다.

둘째로는 직관력이 상당히 발달한다.
직관력은 사물의 본질을 꿰뚫어 볼 수 있는 능력이다.
이렇게 얘기하면 상당히 거창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대단한 것은 아니다.
사람들의 속임수, 정치인들의 장난, 그런 일들의 본질을 저절ㄹ 알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사이비 종교인이나 사교를 전파하고자 접근하는 사람들의 의도가 쉽게 간파된다.

셋째, 기억력이 증가한다.
그렇기 때문에 수련을 계속하면 학업에 상당한 도움이 될 것이다.
공부하기 전에도 잠깐 명상을 한 후에 시작하면, 학습 능력이 증가 될 것이다.
연구나 발명에 종사하는 사람들은 하루에 한 시간 이상 수련하기를 권한다. 전에는 잘 풀리지 않던 문제들이 실마리를 찾게 될 것이다.
명상 중에 떠오른 형상이 뛰어난 발명을 가져 올수도 있을 것이다.

이렇게 정신력이 발달함으로써 현실에서 최선을 다 할 수 있게 될 것이다.
사실, 유체이탈보다 이런 소득이 훨씬 더 소중한 것이다.
자기 수련으로 꾸준히 노력하는 사람은 반드시 이런 효과를 얻게 될 것이고,
정신력도 강해지고 용감해 지기도 하지만, 건방진 사람이 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런 사람들은 언제든지 이탈이 가능하다.

필자는 이탈 행위를 가르치고자 하는 것이 아니다.
이탈은 사후 세계를 알게 하는 열쇠임은 틀림없지만,
준비가 되지 않은 사람은 할 필요가 없다.
스스로 수련함으로써 자신의 능력을 최고로 계발하여 현실에서
확고한 직업과 행복을 누리게 되는 것을 바란다.

뭔가 조금 알게 된 사람들이 현실을 무시하고 이상한 방향으로 변해가는 것을 자주 보게 된다.
현실에서 잘되어보려고 노력하는 사람들을 비웃기도 한다.
이런 행동은 뭔가를 잘못 아는 것이다.

사람은 누구나 태어 날 때 살아서 해야 할 일이 있기 때문에
환생의 기회가 주어진 것이다.
내가 세상에서 태어난 이상해야 할일은 잘 해내야만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부지런 실력을 쌓고, 다듬어야만 하는 것이다.
자타가 공인 할 수 있는 실력이 있어야 현실에서 확실한 자리를 잡을 수 있다.

확실한 위치와 자리를 잡아야 자신의 의무를 다 할 수 있게 되고,
자신의 현실 생활이 흔들리지 않아야 그 토대위에 올바른 정신세계를 구축 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어설픈 지식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

단순하게 잘 사는 사람도 많은데 왜 이렇게 복잡하게 살아가야 하는지 의문을 품을 사람도 있을 것이다.
아무리 얘기해도 알아듣지 못하는 사람은 알아듣지 못한다.
그것이 자신의 수준이고 한계다.
우리 인생에서 월반(越班)은 없다.
단 한번에 깨닫고 도통하여, 단번에 윤회의 사슬에서 벗어나 천국에 안주 할 수 있는 방법은 없다.
step by step.
누구든지 이 원칙에서 예외는 없다.
사람마다 수준이 다르고, 가치관이 다르고, 목적이 다른 이유는 무엇일까?
우리 모두가 환생을 거듭하면서 쌓은 정도가 다 다르기 때문이다.
같은 부모에서 태어난 형제들도 각각 다르고, 쌍둥이 형제도 다르다.
생각이 다르고, 인생의 행로도 다 다르다.

다음 생은 내가 만들어간다.
현재의 생각과 행동과 목적으로 다음생의 향배가 정해진다.
그렇기 때문에 현생에서 잘 살아가야만 하는 것이다.

왜 우리의 선조들을 윤리 도덕의 바탕위에서 살아가라고 했을까?
왜 마호멧은 불쌍한 사람들을 도우라고 가르쳤을까?
왜 석가는 모든 사물을 자비심(慈悲心)으로 대하라고 가르쳤을까?
왜 예수는 무조건 용서하고, 사랑하라고 가르쳤을까?
우리 진지하게 한번 생각해보자.

공연히 심심해서 그랬을까?
사람들끼리 화목하게 사는 것이 도대체 당신들하고는 무슨 관련이 있길래
그렇게 가르쳤을까?
그렇게 사는 것이 보기 좋아서일까, 자신들의 영광을 위해서일까?
그렇게 사는 것이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길인가?
아니다.
그것은 바로 사람들을 위해서 그렇게 가르친 것이다.
그렇게 살아가는 것이 윤회에서 벗어나 천국으로 가는 길이라는 것을
스스로 알게 하려는 배려인 것이다.

이렇게 바른 길을 잘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아지면 많을수록 좋다.
이렇게 바른 마음으로 사는 사람들이 정계나 학계, 종교계에 많아지면
얼마나 좋을까…
개인을 위해서나 이 사회를 위해서 그보다 더 좋은 일은 없을 것이다.

<후기>
95년부터 쓰기 시작했는데, 2001년에 완성했다.
별로 대단한 것도 아닌데 그렇게 오래 걸렸을까?
서두에서 말했듯이 망설이고, 주저하고, 걱정하다가
대부분의 시간을 허비해 버리고 말았다.
내가 좀더 높고 깊은 경지에 이르렀으면
이 글을 덮어버렸을 지도 모른다.

높은 경지에 다다른 분들이 책망할지도 모르겠다.
쓸데없는 짓을 한다고…
하지만, 내 주제에 겨우 할 수 있는 것이 이 정도뿐이니
도리가 없다.

사이비들에게 속아서 현혹당하는 사람들이
없었으면 하지만, 필자의 뜻대로 될지는 의문이다,

필자는 초능력자도 아니고, 도사도 아니라는 점을 분명히
해두자.
이렇게까지 얘기해도 설마 하면서 자꾸만 어려운 부탁을 해온다.
이 글을 다 읽어보았다면 그대로 이해하면 된다.
필자의 능력을 숨겨 귀찮은 일을 하지 않으려고 하는
수작이 아님을 확실히 밝혀둔다.

필자는 아주 평범한 사람이다.
아내가 있고, 자식이 있는 전형적인 소시민이다.
길거리의 포장마차에서, 목욕탕에서, 이발소에서 늘 만날 수 있는 사람이다.
초능력이라고 부르는 행위를 단 한 가지도 할 수 없으며,
해 보려고 시도한 적도 없다.

독자들이 이해할 만큼은 썼다고 생각되지만
그래도 질문할 일이 생길 독자들도 있을 것이다.
재삼 얘기지만,
필자의 경험과 지식은 아주 작은 것에 불과하다.
그렇기 때문에 시원하게 답변 해줄 수 없는 것도 많을 것이다.
그렇더라도 실망하지 말기 부탁드린다.

2001년 필자.

[출처] 유체이탈 (에너지힐링 (Energy Healing)) |작성자 하이패스https://cafe.naver.com/energyhealing.cafe